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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기독교 선교 이전의 기독교 접촉의 흔적들 조회수 : 2231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1-18
묘하게도 기독교는 한국 역사 속에서 비극적인 위기 때마다 한번씩 접촉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접촉으로 끝났을 뿐 체계적으로 전파되지는 못했다.

로마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경건한 신학자였던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동방에 눈을 돌리고, 선교사를 훈련시켜 인도와 중국에 파송하였는데, 이 때 중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는 광명의 종교"라는 뜻으로 "경교"라고 불렀다. 당시 당나라에서 대단히 유행하여서 조야가 모두 경교를 믿을 정도였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열망을 가지고 당나라와 다양한 외교적인 접촉을 하던 시기였다. 김춘추 등이 자주 당에 왕래하였는데, 경교는 이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우리 나라에 전파되었다. 이 때 전파된 경교의 흔적이 우리 나라의 여러 곳에 아직 까지도 남아 있다. 예를 들면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된 “경교 유허비”라든 가. 경주 남산에서 발견된 당간지주의 십자가 문양이라든가. 경교에서 사용하던 형태의 십자가 등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에 미루어 볼 때 신라와 경교가 어떤 형태로든지 접촉하였을 것이라는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적극적인 선교활동이나 체계적인 선교전략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경교를 통해서 전파된 복음이 한국의 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다가 먼 훗날 이 땅에 그토록 아름다운 신앙의 꽃을 피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또 한차례의 접촉은 원나라의 지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징기스칸의 몽고군은 중국을 통일한 후 서방으로 눈을 돌려 중동과 근동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후 "모든 종교는 존경의 대상”이라는 징키스칸의 주장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후 1253년 루브루크가 원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그는 원에 머물면서 당시 극동지역의 상황을 세계에 알렸다. 그가 선교 여행을 하면서 기록한 기행문에서 우리 나라를 Caule(고려) 라고 소개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Coree, Korea로 변천하여 우리 나라의 영어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Korea라는 명칭은 선교사의 복음전파와 함께 세계에 알려지게 된 셈이다. 이렇게 우리 나라는 역사의 고비마다 기독교와 접촉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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