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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을미사변과 프로테스탄트 반일의식의 형성 조회수 : 2524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1895년 이 해는 청일전쟁이 1년만에 끝난 해이며, 명성왕후가 일본의 폭도들에 의해 침전에서 살해당해 나라의 비분이 절절히 사무치던 해였다.

“일본인들은 … 방 한구석에 숨은 몸집이 작은 여인을 발견하자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왕후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 여인은 부인하며 마루로 탈출하려 하였다. 그 찰나 불의의 일격을 당한 여인은 비명을 울렸다. … 모살자들은 석유를 날랐다. 그리고 아마도 채 절명하지도 않았을 왕후를 홑이불로 싸서 얼마 멀지 않은 녹원의 수림 속으로 운반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석유를 그 몸에 계속 부르면서 불을 질렀다.”

일국의 왕후의 최후의 장면이다. 충격을 받지않은 백성은 아무도 없었다. 1985년 10월 8일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종은 이 참혹한 시련을 이길 힘이 없었다. 왕후의 시해가 있었던 다음날 알렌과 뮐렌도르프가 왕궁에 들어왔을 때 고종은 의기소침한 상태였으며, 그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였다. 고종은 체면을 무릎 쓰고, 왕후의 서거를 한없이 슬퍼하면서, 누가 자신을 도와주면 “머리카락으로 짚신을 삼아 주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을미사변(왕후시해사건)이후 서양인들은 공포에 떠는 왕을 궁궐 밖으로 모셔내려는 모의를 하였다. 이 사건을 춘생문 사건이라 하는데, 이 사건에 미국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에비슨 헐버트 그리고 제너럴 다이가 참가하였다고 한다.

감리교 선교사였던 에비슨은 을미사변 이후 고종을 요청으로 계속 왕궁을 드나들면서 고종의 식사를 점검하고, 고종이 공포와 고독을 이겨내도록 도와주었다. 나중에 에비슨의 말은 들은 언더우드도 급히 왕궁으로 들어갔고, 뒤에 헐버트도 들어가서 두려움에 떠는 고종과 새파랗게 질려있는 왕자와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때 파랗게 질린 왕자와 고종은 두려움에 탄식하며 “아무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는고”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선교사들의 손을 잡을 때 선교사들은 엄숙한 사명감을 느꼈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국왕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이때부터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 속에는 국민감정과 뜨거운 반일의식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로써 민족운동의 주체가 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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