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홈  >  자료실  >  한국교회사

목록보기

  제  목 : 일제의 교회탄압 - 105인 사건 - 2 조회수 : 2823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105인 사건의 재판은 실로 가관이었다. 이른바 증거물로 제출된 유일한 근거인 공술서는 견딜 수 없는 고문 때문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사건 자체가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검사가 제출한 문구에는 60명의 암살 음모자들이 정주역에서 사건 전날 기차 편으로 선천역까지 왔다는 진술이 있었는데, 안태국의 요청에 따라 다음날 법원서기가 정주역에서 조사해본 결과, 그날 아침의 선천행 차표는 다섯 장 밖에 팔리지 않았고, 하루 종일 팔린 기차표도 11장밖에 발매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1911년 12월26일 안태국이 주모자로 선천역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그때 안태국은 서울에 서 유동렬 양기탁 이승훈과 함께 명월관에서 저녁을 한 알리바이가 밝혀지고 말았다.

안태국의 매서운 반증으로 일제의 날조의 전모가 폭로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안태국을 마치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해낸 모세와 같은 인물로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 이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야만적인 고문 때문이었다. 공개된 재판정에서 소위 피고인들은 저마다 일어나서 이 사실을 알렸다. 묘하게 고문을 당했기 때문에 얼굴에 상처가 없는 이들은 일어나서 옷을 벗어 보이겠다고 떠들었다.

천하에 무법자들이었던 일본의 사법권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용기는 크리스천만의 힘이었다. 그러나 재판장은 이런 저런 핑계로 1912년 10월18일 남감리교의 윤치호를 비롯하여 105인에게 5년~10년의 형을 구형하였다.
비록 형고를 받았던 사람들이 여러 차례 감형에 의하여 1915년 2월까지는 모두 다 풀려 나왔으나 이 사건은 일본과 한국이 최초로 그 정신적인 면에서 대결했던 명예롭고도 조용한 싸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핍박의 음모는 “기독교의 일본 세력의 대립과 항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옥에서 풀려나온 분들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평양역 광장에는 시민 9천여 명이 운집하여 그리스도의 신앙에 이끌려 정의와 인간존엄을 위해 희생되었던 분들의 도착을 울먹이며 환영하였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시련, 국운의 비애 속에서도 겨레와 함께 걸어가겠다는 강한 결의를 보여준 교회였다. ♣

 "

  이전글 : 일제의 교회탄압 - 105인 사건 - 1
  다음글 : 교회의 조직과 선교 - 장로교회/침례교회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