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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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기독교 교육 조회수 : 2301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교회가 그 신앙의 골격을 다져가고, 선교의 범위를 넓혀갔지만 합병 이후 교세는 정체되었고, 일사불란하게 진해되던 해외선교 사역도 점차적으로 그 열기가 식어가기 시작하였다. 1908년 해삼위에 파송되었던 최관흠목사가 사역을 배반하고 동방정교회로 전향한 것 뿐 아니라 질병과 빈핍으로 선교지에서 유리하는 선교사의 수가 늘어갔다.

이런 가운데서 교회가 눈을 돌린 것은 주일학교 운동이었다. 최초의 주일학교 운동은 1890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주일학교 운동이 적극적으로 확상되기 시작한 것은 1907년이었다. 이 때 장,감연합공의회는 세계주일학교 연맹과 교섭해서 한국에서 주일학교 일을 전담할 사람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이것이 결실이 되어 1912년 2월에 13명이 모여서 한국 주일학교 실행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아울러 만국통일공과를 편찬하였다. 이 주일학교운동은 새로운 자극과 기회를 한국 교회에 제공해 주었었다.

1013년 4월 29일에 경복궁 뒤뜰에서 주일학교 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14,700여명의 인파가 운집하였다. 이러한 청소년층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기독교 계통학교에서의 교육진흥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15년 3월에 연희전문학교가 출발하게 되었다. 1912년 북감리교에서는 우리 나라의 교육사업에 관하여 논의한 후, 고등 교육기관이 부족한 한국에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덕육, 지육, 체육의 완전한 교육을 실행할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한국문화에 공헌할 인재를 배양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감리교회의 움직임은 언더우드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사실 당시 장로교회는 서울에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남,북 감리교회와 북장로교회가 참여한 가운데 연희전문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때마침 총독부에서는 1915년 3월에 사학의 통제와 감독을 강화하는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하여 교회의 새로운 기운을 막으려하였다. 총독부는 이 규칙에 의거한 시설을 10년 이내에 완비할 것을 요청하였다. 사실 당시 교회는 총독부가 요구한 시설을 완비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6년 감리교의 윤치호가 YMCA 총무로 취임하고, 평양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국민회’가 조직되어서 적극적인 모금활동으로 학교에 새로운 소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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