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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3.1운동과 교회의 활약 조회수 : 2353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교회는 국내외에 독립선언서와 각종 문서를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고, 평양 기독교 선원의 총무였던 안세환은 일본에 가서 정치인들에게 조선독립의 역설하고, 경시총감에게 독립에 관해서 진술하였는데, 이일로 인하여 일본에서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담에 보내는 문서는 감리교 목사인 헌순과 김지순전도사가 맡아서 처리하였으며, 국내의 각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은 정동감리교회 목사인 이필주와 배제학생이었던 김진호가 담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1919년 3월1일 서울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29명이 참삭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으며, 같은 시각에 파고다 공원에서는 태극기의 물결 속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이 만세시위는 즉각적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평양에서는 감리교의 남산재교회와 장로교의 장대재교회에서 고종의 봉도회를 치른 후, 계속해서 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에 돌입하였으며, 진남포에서는 감리교 학생 120명이 교회당에 모여 시위하고, 다음날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안주에서는 김화식집사가 평양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서 천도교와 합동으로 독립운동은 전개하였고, 선천에서는 신성학교 교직원과 학생 수 백 명이 ‘조선독립단’이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하였다. 이들이 경찰서에 다다랐을 때 그 수는 3천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날 일경은 3.1독립운동 발발 이후 최초로 시위군중을 향해서 총탄을 퍼 부어 12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원산에서도 감리교의 정춘수목사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2천 여 명의 군종이 운집하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 시위는 남쪽에서도 뜨겁게 확산되었다. 대구에서는 이만정목사가 주도하여 만세운동을 벌임으로 경북지역 운동의 선구가 되었고, 전주에서는 기독교인, 천도교인과 신흥학교 학생들이 목판으로 인쇄한 태극기를 들고 시가를 누볐다.

이렇게 교회가 3.1독립운동의 선봉에서 맹활약을 하게 된 것은 우선 교회는 역사적으로 전제정치에 대해서 강력한 항거를 해왔기 때문이고, 또한 교회는 본질적으로 타고난 결속력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는 전 세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으로는 하늘에 소망을 둔 절망을 모르는 신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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