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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3.1운동과 교회의 피해 조회수 : 2484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기미년 독립운동에 대한 가장 가혹한 보복이 교세가 우수한 지역과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내려졌다. 일본은 경찰과 헌병의 병력으로 교회를 때려 부수고, 종탑과 성경책을 불태웠다. 검거선풍 역시 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지고 있었다. 확실히 총독부는 기독교인들이 이 소란의 주범이라고 간주하였고, 그에 따른 행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교회가 당한 피해 상황을 자세히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피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21일, 한 기독교 여신도의 진술이 “한국독립운동사”라는 책에 실렸다. “나는 평양에서 3월2일 체포되어 경찰에 구금되었다. 경찰은 우리가 기독교인인가를 자세히 물어보았으나 그날은 별로 심한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12명의 감리교 여자들과 2명의 장로교 여자 그리고 1명의 천도교 여자가 있었는데, 감리교 여자들 중 3명은 전도부인(전도사)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경찰은 감자기 우리를 불러내더니 채찍으로 때리고 옷을 다 벗기고 벌거숭이로 여러 남자들 앞에 세워 놓았다. ?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모욕과 조롱을 우리는 다 받았다.”

3.1운동 도중에 가장 비 인도적인 참화는 수원부근의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어났다. 만세시위가 막바지에 이른 그해 4월 15일 낮 2시경, 아리다라는 일본인 중위가 제암골에 나타나서 교인들을 그곳 예배당에 모두 모이게 한 후 군인들이 총을 쏘면서 예배당에 불을 질러서 그 안에 있던 교인 30명이 다 타서 죽었고, 교회당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학살과 만행은 기독교인이 사는 15개의 마을에서도 자행되었다.

이외에도 교회가 당한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없을 정도이다. 조선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전부 파괴된 예배당이 17동, 일부파괴된 것이 24동, 그 외 예배당의 피해가 41동으로 교회의 재산상의 피해가 약 3만 달러에 달했고, 오산중학교의 피해가 5천 달러였다. 1919년 6월 30일 현재 투옥된 기독교인의 수가 2,190명으로 유교나 불교, 천도교를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았으며, 교역자도 151명이나 수감되었다. 그 당시의 교세나 교역자의 수를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통계는 총독부에서 조사한 것으로 사실과는 거리가 너무 먼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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