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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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한국교회와 3.1운동 조회수 : 2302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1919년 10월에 장로교 총회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장로교인들과 교회의 피해상황을 아래와 같이 보고하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자의 수가 3,804명, 체포된 목사와 장로의 수 134명, 기타 기독교 관계 지도자로서 수감된 자의 수 202명, 사살된 자 41명, 그날 현재 수감 중인 자 1,642명, 매 맞고 죽은 자 6명, 그리고 파괴되거나 불태워진 예배당의 수가 12개소이다. 그런데 함북노회만 해도 26명의 참살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교회가 참화 속에 시달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만주 지방의 교회까지 무서운 핍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만주 땅에서까지 3.1운동의 피해를 받았다고 하면 국내교회가 어떤 고통 속에 있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처럼 교회는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앞장서서 고통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야말로 애국의 얼이 담긴 진정한 장소’라는 것이 알려지자 젊은이들이 앞을 다투어 교회로 몰려오게 되었고, 교회는 다시 한 번 부흥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보여주기 시작한 선교전략과 소극적 태도는 교회를 사회를 향한 적극적인 참여로부터 좁은 차원의 종교적 경건으로 돌아가는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1 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교회의 태도는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첫째는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기독교적인 요소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실제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데 기독교 지도자들의 태도는 적극적이지 못했다.

둘째로 일부 교회가 이 운동에 참여하는데 매우 수동적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기고 있었는데, 그것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것을 통해서 가족들이 받은 피해에 매우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감리교 목사인 신석구와 같은 이들은 목사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의 문제로 고민하였고, 거사당일에는 장로교의 길선주 등 4명의 목사가 사경회 등을 이유로 불참하였다. 후에 33인의 서명자가 재판을 받을 때 길선주는 무죄로 석방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국교회가 일제의 학정이라는 어려운 시기에서도 겨레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한시도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교회의 지원과 도움이 없었다면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폭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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