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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사회변화에 직면한 한국교회 조회수 : 2527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독립운동의 뒤를 이어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퍼져서 교회는 1907년에 버금가는 급격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였다. 해외에 대한 선교도 강화하여 남감리교회가 1920년 만주와 시베리아에, 북 감리교회가 만주에 그리고 장로교는 1917년에 방효원 홍승한 목사를 산동성에, 그리고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를 덩지에 파송하였으며, 거기서 기독병원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교회는 다양한 방면에서 성장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기독교의 민족운동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1919년 10월 평양의 박승명 박관선을 중심으로 한 대한국민회의 통곡운동, 황보덕삼의 상해 임시정부의 교통부 관서지부 결성과 독립자금모금, 11월 경성을 중심으로 한 대한 애국부인회 조직과 독립자금의 상해송금, 12월의 임시정부 연통제의 함경북도지부의 조직과 김인서의 군자금모집, 1920년 8월의 대한민국 자결 국민회의 극렬활동, 그리고 10월의 평양중심 애국부인회의 자금모집과 상해 송금활동 등 일본경찰의 조사를 받은 활동만 해도 14건을 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교회는 밖에서 밀려오는 지적인 분위기와 변화, 반미적 경향, 경제적 시련, 그리고 민족말살을 획책하는 일제의 탄압 등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기독교역사상 처음으로 심각한 자기반성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먼저 일제로 인한 선교정책 제약 때문에 신학교육 수준의 향상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는 새 학문이 일본을 통해서 밀려들어올 때 그 지적인 빈곤을 쓰라리게 경험하였다.

당시는 개화기로부터 계속되던 민족을 향한 불타는 여망은 흐려지고 있었고, 사회는 좌절로 좌초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은 무엇인가?” 등 당시 유행하던 노래들은 탄식조의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공초(空超) 오상순은 당시의 사회 상황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조선은 황망한 폐허의 조선이요, 우리 시대는 비통한 회한의 시대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민족의 지도자로의 역할을 감당하거나 교인들을 지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동안 교회가 가지고 있던 소박한 복음적 신앙은 그 열정이 식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은 사회를 변화시킬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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