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홈  >  자료실  >  한국교회사

목록보기

  제  목 : 1920년대의 사회상황 조회수 : 2792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사이또 총독은 무단정치를 문치정치로 전환한다고 하면서 조선사회에 문화를 향한 넓은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그 공간을 통해서 건강한 문화운동 뿐 아니라 공산주의와 세속사상도 격류처럼 흘러 들어왔다. 이를 통해서 조선사회는 기독교만이 서양문명의 전부가 아님을 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위기였다. 기독교는 왠지 미국과 관련이 있는 것 같고, 공산주의는 소련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교회는 비교적 보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으나 공산주의는 현실적이고 진취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공산주의는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던 사회적 하류층에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1907년에 입교하였던 이동휘가 한국 최초로 하바로스크에서 1918년 6월 25일 조선사회당을 창당하였고, 1919년 6월 25일에는 우라디보스톡에서 고려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더구나 새문안교회 장로였던 김규식은 평양신학교와 남경의 금릉대학 신학부를 다닌 적이 있는 여운형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극동 피압박민족대회”에 “기독교도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참석하였다. 실상 1921년 5월에 코민테른이 조선에 보낸 “조선 공산단 프레트폼”에는 종교박해를 경계하고. 그 박해가 오히려 신앙을 강화시키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를 무기력하게 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강한 의도를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1920년대의 조선사회는 일제의 포학과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교회는 민족의 고통을 짊어지고 함께 걸어야만 했다. 교회도 나름대로 이런 요청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1922년 남감리교의 남궁억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371장)이라는 찬송을 만들어서 보급하였는데, 이 찬송가에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강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곧 금일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가세 일하러가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가세”라고 노래하였다. 이와같이 당시 피폐한 조선사회는 교회의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이전글 : 사회변화에 직면한 한국교회
  다음글 : 교회의 사회운동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