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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교회의 사회운동 조회수 : 2704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교회는 사회의 이러한 요청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남감리교회는 미국 기독교연합회의 사회신경을 장정(교회법)에 편입하면서 복음의 시대적 번역과 그 사회화를 역설하였고, 조선 장감연합협의회(장로교 감리교협의회)는 1920년 선교사 연합회의 제안을 받아 기독교가 사회적 봉사를 실천하기 위하여 정신병자 보호원, 고아 양육원, 연로 불구 맹아들의 양로원, 쇠약한 여자 구호원, 나병 폐병환자 병원설립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25년에는 사회부를 설치하여 구체적으로 이 일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5년부터는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는 물론이고 청년운동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잡았다고 확신하고,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정면 도전에 나섰다. 그 기선을 잡은 것이 서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한양청년동맹”이었다. 이들은 1925년 10월23일 조선 주일학교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바로 그 앞 광장에서 노골적인 반기독교 집회를 열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자 기독교의 사회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회개혁의 근본에 ‘동포사랑’이라는 대
전제가 깔리게 된 것이다. 가령 금주 금연 운동의 정신이 그랬다. 당시 주초대는 연간 2억원에 이르고 있었지만, 교육비는 1천만원에 불과했다. 그래서 “주초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기 운동”등을 펼치면서 민족의 건강한 미래를 위한 사회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기독교는 그 사회운동을 기독교화 시키면서 동시에 민족의 행복한 내일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목표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YMCA는 또 다른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부터 YMCA는 농촌사업을 “경제적 향상과 사회적 단결 그리고 정신적 소생”이라는 복음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은 한국교회에서 경제적 각성이 절정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국제 선교협의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신흥우 김활란의 자극 때문에 사업사회에서의 교회 선교가 촉진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장로교와 감리교는 각각 농촌 선교부를 설치하였고, YMCA에서는 "농촌청년“을 정기 간행하였으며, 다양한 형태의 간행물과 농촌 계몽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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