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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김익두목사의 부흥회 조회수 : 26639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30
김익두목사는 한국 교회의 부흥회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1900년 곧 그의 나이 27세 되던 해에 기독교로 전향했고, 1902년 성례에 참석하기 전까지 이미 신약성서 100독을 마친 열정과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가슴을 칼로 찢는 것과 같은 성령의 내적 임내를 경험한 후 재령을 거쳐 신천 등의 교회에 시무하면서 불같은 성령의 임재, 기적의 신유를 전하는 부흥사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그에게 실질적인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 사경회 때의 일이었다. 그때 그는 아래턱이 완전히 늘어진 박수진이란 사람을 기도의 능력으로 고친 일이 있다. 그 당시는 심각한 민족의 아픔과 몰려드는 세속문명의 물결 속에서 가치관의 심각한 혼돈을 경험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김익두목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한국교회의 전환기를 이끌어간 불과 같은 하나님의 사자였다.

그의 이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20년 중풍병자, 혈루증 여인, 앉은뱅이, 고령의 반신불수 등 수 많은 사람을 치료하였는데, 임택권이란 목사는 김익두를 3년 동안이나 철저히 조사하여 “이적 증명서”라는 것을 만들어 주었고, 장로회 총회에서는 교회헌법에 “금일에는 이적을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는 조문을 수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영적인 사랑과 함께 육적인 사랑도 강조하였고, 성령의 능력과 기도의 힘, 그리고 소박한 신앙, 고생 후엔 낙이라는 소식을 계속 전하였다.

그런데 1926년부터 심각한 반발이 교회 안팎에서 김익두에게 집중되었다. 이런 공격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1926년 간도의 용정에서는 철근공격을 받아 예배가 중단되었고, 이리교회의 집회 때에는 민중운동가들의 반종교적 시위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발은 그가 담임했던 남대문교회의 신진 지식층에게도 나타났는데, 이들은 신앙의 미신화를 지적하면서, 신유를 핑계로 우매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건강한 기독교 신앙을 말살한다고 공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적 배경이 별로 없는 김익두 목사가 혼란기의 조선사회에서 원색적 기독교운동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공헌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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