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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이용도의 신비주의 3 조회수 : 2636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4-07
그 후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반신학적이라 하여 다양한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그가 속해 있던 감리교단에서 마저도 휴직 처분을 받게 되었다. 휴직처분을 받은 이용도는 얼마 후 해주에서 여러 교인들에게 돌에 맞았고, 원산에 가서 치료하다가 지병인 폐결핵으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가 임종 할 때 마지막으로 부른 찬송은 “아름다운 내 본향 목적 삼고…거기 풍파 일지 않네”라는 찬송이었다.

“아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 송이 백합화…, 고요히 이름없이 지나 갈 고독한 야생화! 이제는 소문 놓고 노방에 찢길, 이름 좋은, 그러나 역시 고독한 백합화”이용도는 이렇게 해서 1933년 10월2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는 그렇게 닮기 원했던 예수와 같은 33세였다. 김인서가 1932년 2월에 이용도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한 말이 있다. “내 주여! 이 땅에는 영웅도 가고 위인도 없나이다. 우리에게는 영웅이나 위인이 없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의인만은 보내 주셔야 합니다. 행여 당신이 보낸 사람을 보았사오니 내 주는 저와 함께 하옵소서.”

그는 실로 선교사의 영향력이 거의 사라지고, 교회는 사회의 변화와 도전에 신음하던 1930년대에 나타나서, 50년 선교역사를 가진 한국 교회의 자립과 토착화의 실험에 나서서 고고한 음성을 내다가 조용히 사라져간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한 신앙인이었다.

그 이후에 황국주라는 청년이 기도하다가 특별계시를 받았다하여 수염을 기르고, 마치 예수의 형상처럼 꾸민 후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게 하였는데 그 무리들 가운데 교회의 장로였던 그의 부친도 끼어 있었다고 했다. 1927년에는 원산에서 유명화라는 여자가 자기에게 예수의 영이 친히 임했다하여 이단정죄를 받았다.

이처럼 1930년대에 신비주이 적인 신앙이 출현하게 된 것은 1920년대부터 교회의 신앙이 형식적으로 흐르고, 역사의식이 결여되었을 뿐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무기력한 교회의 모습에 대한 실망이 그 원인이 되었다. 난세에는 이용도와 같은 훌륭한 신앙의 사람도 - 최근 감리교 뿐만 아니라 장로교회에서도 이용도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조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나타나지만 해괴한 신앙도 생겨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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