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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장로교회의 분열 1 조회수 : 2589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4-13
1930년대에 와서 교회 분열의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요소들은 대체로 두 가지 정도인데, 그 하나는 지방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것이다.

당시 기독교인의 분포는 남한보다 북한 쪽에 편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남한의 교회들은 교회문제에 남부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음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지방적인 차이는 묘하게도 보수와 진보의 차이로 나타났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쪽 지역의 신학은 철저한 보수주의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방적인 차이는 여러 차례 갈등을 일으켰는데, 1911년에 서울에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보조하는 문제가 났을 때도 평양의 교회들은 이 학교가 서울에 소재한다는 이유로 그 계획에 반대했던 것이다.

이처럼 암암리에 발생하던 갈등과 대립이 마침내 1934년에 표면화되었다. 1934년 그해는 조선 기독교 역사 50년의 희년이었다. 당시 교세는 525,200명으로 발전해 있었고, 교회는 성년의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해 총회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해 장로회 총회는 남부에서 온 총대(총회대표)들을 ‘근대주의자’라고 비난하였고, 남부의 노회(장로교회의 지역단위 조직)들은 북부가 독재를 하고 있는 한 총회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을 한 것이다.

두 번째 분열의 원인은 신학적인 문제였다. 1934년 사무엘 메펫 박사는 한국에 와 있는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보수주의자라고 자찬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이라는 말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몇 사람의 예외는 “근대주의자들이요, 악하고 반역적이며, 배신자의 무리”라고 비난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한국인 목사들이 귀국하여 세계적인 신학의 조류들을 소개하면서부터 한국교회 안에서도 진취적인 신학적 기운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산정현교회에서의 송창근박사(목사)의 사직이었다. 박형룡박사의 후임으로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송창근박사는 그의 진취적인 신학적 견해 때문에 조만식 장로를 비롯한 교인들의 배척을 받아 부산진교회로 밀려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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