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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장로교회의 분열 2 조회수 : 3815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4-22
치열한 신학적 대결이 평양신학교의 박형용박사와 숭인상업학교 교목이었던 김재준목사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김목사는 한국에서의 신학교육이 단일하고 고루한 전통신학과 고정된 교리를 주입식으로 가르치는데 그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그는 “신학지남”에 투고한 글에서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반박하고 한국교회의 주체의식을 방해한 선교사들을 공격하며, 한국교회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반대로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한 박형룡박사는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한국교회의 신학이하는 것은 우리 나름대로의 신학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단 한글자로 오류가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김재준목사의 글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지남에 더 이상 싣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대결을 배경에 두고 1934년과 1935년의 장로교 총회는 심각한 신학적인 분열을 가져왔다. 1934년 남대문교회의 김성주가 창세기는 모세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감춘배 목사가 여권신장에 관한 자유주의적 주장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 1935년 총회에는 몇 가지 더 큰 문제가 의제에 올랐는데, 서울에서 YMCA총무인 감리교의 신흥우를 중심으로 조직된 ‘적극적 신앙단’에 가입한 장로교 목사들에게 탈퇴를 명한 것과 길선주 목사와 황해노회의 결의로 제기된 ‘아빙돈주석’의 정통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 주석은 감리교가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유형기목사의 주도 아래 편집 간행된 것인데, 그 번역진에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등의 장로교 목사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박형룡박사는 성경을 비평적으로 분석하여 기록한 주석의 편집에 참여한 장로교목사들에게 공개적인 사과를 받기로 결의하였다.

이렇게 분열의 징후가 감도는 중에 25회 총회가 1936년 광주에서 열렸고, 이 총회에서는 그동안 축적되었던 문제들이 모두 다 쏟아져 나왔다. 이 회의는 교회 역사상 처음보는 불상사로 그 명예가 더러워졌고, 교회는 분열의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7년 10월 29일 승동교회에서 총회의 간곡한 요청에 피차에 순종함으로 일단 분열의 위기는 모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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