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홈  >  자료실  >  한국교회사

목록보기

  제  목 : 신사참배 3 조회수 : 3555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5-25
일본은 결정적인 교회 박멸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1938년 전국에서 장로교회의 노화가 모이기 시작하자 일본은 여기에 조직적인 파괴공작에 나섰다. 각 노회는 개회 벽두에 신사에 가서 참배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순천노회가 여기에 그 첫 희생의 비명을 올렸다.

그해 가을, 총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 일본은 이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우선 강경파인 주기철목사와 채정민, 이기선목사를 예비 검속하고, 친일목사인 이승길과 김일선을 통하여 표독한 분리공세를 편 다음, 총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협박으로 신사참배의 가결을 촉구하였다. 지방 문제와 근대주의 문제로 허둥지둥하던 약체 총회는 이러한 위협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1938년 9월 9일 제27회 총회가 평양의 서문밖교회에서 열렸을 때 경관 97명이 193명의 총대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살기등등한 눈길로 회의 진행을 감시하였다. 첫날에 임원 성가를 마치고, 둘째 날 오전 10시, 평양 평서 안주노회를 대표해서 박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하면서, 신사참배 결의와 성명서 발표를 제안하였다. 그러자 블레어 선교사가 즉각적인 반대 발언을 하였지만 경관의 거친 제지를 받아 퇴장하였고, 홍택기목사의 가결획책으로 신사참배결의안이 가결되고 말았다. 그러자 일본은 총회의 결의안과 종교단체법을 이용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총회 폐회 후 부회장이 임원을 대표하고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해서 평양신사에 참배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드디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이 때부터 교회를 향한 박해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였다. 일제는 1945년 8월 1일 한국의 모든 교파를 합동하여 단일교파로 만들었으며, 종교단체법에 의해 일본 기독교 산하의 조선기독교단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해체된 교회도 많았다. 동아기독교는 그 재림사상 때문에 일본의 눈총을 받다가 32명의 교역자가 구속되었고, 마침내 1943년 5월 10일에 해체되었으며, 성결교 역시 재림사상과 교리가 천황의 존엄에 위배된다 하여 교역자들이 구속되고, 교단의 해체 명령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연한공회, YMCA, YWCA가 해산되어 일본기독청년회로 종속되었다. ♣

 "

  이전글 : 신사참배 2
  다음글 : 새 교단의 출현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