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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조선의 가톨릭 박해 - 1 조회수 : 2437
  작성자 : 박행신 작성일 : 2003-02-10
조선의 카톨릭 교회는 인조 이후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민간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넓게 보급되었다. 그러던 중 신해년에 와서 전라도 진산에서 윤치중과 권상연이 기독교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르는 사건이 생겼다. 이에 대하여 조야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는 ‘패륜의 도’로서 나라의 양식을 깨치고 백성을 혹하는 무리들이라 하여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이들을 참형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해교난이다.

그 후 신유년에 이르러서는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치적인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서교(카톨릭)를 탄압하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참형을 당하였고,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당하였다. 특히 청국인 신부로 우리 나라에서 활동하던 "주문모"도 이 때 처단을 당하였다. 그러자 이때 참형으로 죽어간 정약종의 사위인 황사영이 서구의 천주교 국가들이 군사력으로 조선을 위협하여 선교의 자유를 얻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황사영백서)를 비밀리에 보내다가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토사교문’을 내려서 카톨릭의 뿌리를 뽑도록 하였다. 이것이 신유교난이다.

이러한 무서운 교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우들은 순교정신을 발휘하여 교세의 만회에 힘을 썼고, 교황청에서는 세 명의 신부를 파견하여 신앙의 기틀을 만회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정에서는 다시 한 번 대박해를 시도하는데, 그것이 기해대박해이다. 이 박해로 죽은 신자의 수는 무려 113명에 이르렀고,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앙베르 신부를 비롯한 세 사람이 신부가 서로 손을 마주잡고 순교를 하였다. 기해교난이 지난 지 6년째 되던 1845년9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신부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한양에 잠입하여 활동을 하였으나 1년만에 새남터에서 참형을 당하였는데, 김신부의 머리 유해는 지금도 카톨릭대학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대원군이 집권한 후, 그는 서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천주교는 진실한 종교”라고 평했을 정도였다. 또한 당시 주교였던 베르누를 만나보기 원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이 대내외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지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동학혁명의 시련을 겪었고, 밖으로는 제정 러시아가 남하정책으로 함경도지역을 여러번 침공하여 조정을 시끄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랑스와 영국 등과의 삼각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박해로 시달려온 이들은 대원군 주변에 많은 기독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자세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박해의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실제로 대원군의 주변에는 기독교인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지만 결단력있는 행동과 과감한 자문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들에게 걸었던 기대를 포기하고, 오히려 거기에 반발하면서 목전의 여론에 호응하여 질풍과 같은 탄압에 나섰다. 1866년 이른 봄의 일이다. 병인교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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