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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태양의 아들, 잉카 조회수 : 2449
  작성자 : 박행신 작성일 : 2010-07-02


태양의 아들, 잉카 1430-1532 CE

잉카는 차빈, 모체, 나스카, 티아우아나코 지역을 정복하여 정치 경제 문화 언어 및 종교적인 통일 을 이룬 제국이랍니다. 이후 잉카는 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안티슈우, 쿤티슈우, 쿠야슈우, 친차이슈우지요. 이 4개의 슈우는 왕의 형제들이 다스렸구요, 이들을 지배하는 잉카의 신성한 왕은 정치와 종교에 있어서 최고의 통치자였어요.

우리가 잉카문명에 대해서 말할 때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제국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잉카문명은 1438년부터 1533년에 걸쳐 번성한 제국이었으며, 오늘날 페루영토에 자리잡고 있었답니다. 이 기간 동안 잉카인들은 점령전쟁과 평화적인 합방을 통해 안데스산맥을 주축으로 하는 남아메리카 서부의 주요 영토에 제국을 건설했지요.

잉카제국은 광대해진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도로망을 정비했고, 해발 5000m의 고원에도 곳곳에 다리를 놓아서 그 유명한 잉카로드(Camino inca)를 완성했는데, 이 도로망을 이용해서 잉카의 황제는 각 지방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고, 또 적절한 정책을 펼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정복사업을 위한 군대도 빠르게 보낼 수 있었지요.

잉카제국의 11대 황제는 <와이나 까빡>인데, 이 시대에는 영토의 확장은 없었지만, 국가의 제도를 강화하는 한편, 변경인 에콰도르 지방 개척에 힘을 기울였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황제가 수도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귀족세력들이 서로 대립하게 된답니다.

그후 1525년 와이나까빡이 죽자, 정권을 잡기 위해서 아들끼리 싸움을 하게 되고, 결국 아타우알파가 쿠스코 세력을 격파하고 왕권을 잡지만, 그 직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서 1533년 8월 29일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가 살해 당함으로 5천 년을 이어온 안데스 문명은 막을 내리고 말았어요. 이때 스페인군은 겨우 180명이었다고 하네요.


결승문자


위의 사진은 다양한 굵기와 색을 가진 끈으로 만든 결승문자랍니다.

잉카인들에게는 글자, 쇠, 화약, 바퀴가 없었답니다. 그러나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도로망의 정비와 더불어 정보의 전달과 기록 수단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문자의 역할을 하는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했어요. 그것이 키푸(Quipu)지요. 키푸는 다양한 굵기와 색깔의 끈에 여러 종류의 매듭을 여러 위치에 만들어 정보를 기록하는 일종의 결승문자였답니다. 예를 들면 노란색 끈은 황금, 붉은 색 끈은 군인을 의미했고, 매듭을 감은 횟수에 따라서 1~10까 지의 수를 표시하였는데, 십진법을 사용한 거에요.



십진법이 뭐냐구요. 0, 1, 2, 3, …, 9의 10개의 숫자를 한 묶음으로 하여 10단위로 올려가는 방법으로 수를 계산하는 것을 십진법이라고 해요. 사람의 손가락 수에 의해 유래했다고 하네요. 손가락이 열개니까, 10단위의 수를 계산하기 편리하겠죠?


쿠스코



잉카제국의 수도인 쿠스코는 ‘우주의 배꼽’이라는 뜻이에요. 잉카인들에게 세계의 중심은 그들의 수도인 쿠스코였으며, 이곳에는 신전과 왕과 가족의 거주지, 역대 왕을 모시는 공간이 있었구요. 전체적으로는 퓨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어요.



맨위의 사진은 종이 한 장 들어가지 않는 쿠스코의 성벽이구요. 위의 사진에서 붉은 색 선으로 표시된 부부은 퓨마형상을 하고 있는 쿠스코의 모습이에요.



태양의 신전

스페인의 기록에 의하면 코리칸차 신전의 벽은 모두 황금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대단하지요? 그리고 정원에는 금과 은으로 실물크기의 옥수수, 야마, 인물상 등을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다고 해요. 그런데 이 신상들은 스페인에 의해서 약탈당하고, 지금은 작은 소상들만 전해지고 있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신전을 점령한 후 모두 헐어내고, 성당을 새로 지었어요. 그래서 현재는 신전의 기단과 성당내부에 돌로 만든 의례공간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을 뿐라고 하네요.


식사이우아만


식사이우아만은 쿠스코 도심에서 북쪽으로 3㎞떨어진 언덕 위에 위치한 성인데, 잉카의 수도인 쿠스코를 지키는 요새였는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전이었답니다.

잉카 건축의 위대함은 거대한 돌 하나하나를 주변의 바위 모양에 맞추어 세밀하게 깎고 다듬어 올렸다는거에요. 특히 바퀴와 같은 운송 수단이 없었던 잉카에서 이처럼 정교한 건축물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과 많은 인력, 그리고 시간이 소요되었을 겁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없이 정교하게 다듬어 쌓은 성벽의 모습에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랍니다.


잉카의 사회구조


잉카는 정복한 영토를 크게 셋으로 나누었어요. 왕의 토지, 종교의 토지, 그리고 나머지는 농민 공동체인 아이유의 토지지요. 모든 농민은 소속된 아이유 뿐만 아니라 왕의 땅과 태양신의 땅에서 일해야 했답니다.

아이유는 잉카의 가장 작은 경제활동을 공동체였는데, 개개의 아이유는 조상의 미라를 보관하였으며, 이 미라는 집단 전체의 숭배의 대상이었어요. 특히 왕의 미라는 전용 건물에 안치되었으며, 중요한 의례 시에는 광장과 신전에 모셔졌으며, 무당과 같은 존재를 통해서 의사를 표현하였는데, 이는 잉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지요. 잉카 사회는 이러한 아이유를 바탕으로 형성되었구요, 이는 경제활동과 의례활동을 통합하는 효율적인 수단이었답니다.

결론적으로 잉카문명의 독창성은 아이유를 바탕으로 한 정복과 동맹의 과정, 그리고 높은 수준의 관료조직을 통해서 계층화된 조직사회를 통합시키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잉카의 신화와 전설


잉카인들은 세계와 인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비라코차신을 자신들의 창조신으로 섬겼어요. 또한 태양신인 인티를 최고의 신으로 섬겼지요. 잉카의 기원설화에 의하면 잉카는 태양의 아들로, 그 상징인 황금은 태양의 땀으로 여겨졌구요, 은은 태양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여성 귀족을 의미했답니다.

잉카인들은 황금으로 된 태양의 신의 사원인 코리칸차를 짓고, 매년 6월에 인티라이미라는 커다란 축제를 벌였지요. 그리고 매년 각지에서 선발된 10세 전후의 여자아이를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쳤어요. 여자 아이들이 불쌍하지요? 이때 옆의 사진과 같은 작은 남녀의 인물상을 은으로 만들어 제단에 함께 묻기도 하였답니다.

또한 잉카인들은 임신과 출산을 주관하는 달의 신 마마키야,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 그리고 번개의 신, 바람의 신 등 자연현상이나 산, 바위와 같은 특정한 대상에 신성을 부여했는데, 옛날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의 비신에게 빌었고, 바다에 나갈 때는 바다신에게 기도를 드렸답니다.

잉카의 무당들은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코카를 가지고 예언의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페루인들은 지금도 고산병을 이기기 위해서 코카잎을 가지고 다니면서 씹어 먹는다고 하네요. 코카를 씹어 먹으면 고산병이 씻은듯이 사라진다고 하니 신기할 다름이에요.


잉카의 토기와 목기


아리발로는 잉카의 토기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이에요. 공과 같은 구형의 몸통에 원통형의 긴 목을 하고 있으며, 양 옆에는 한 쌍의 손잡이가 달려 있지요. 주로 물, 치차 등의 액체를 담거나 옥수수, 이삭, 콩 등의 작물을 보관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는데, 치차를 담아 신에게 바치는 의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토기였답니다.

높이가 30cm이하의 작은 것에서부터 1.5m가 넘는 것까지 다양한 크기의 아리발로가 있는데, 바닥이 원뿔형태로 된 것은 힘들이지 않고 액체를 따를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에요. 똑똑한 그릇이지요.

그리고 케로는 나무로 만든 원통형의 잔으로 치차 등의 음료를 마시기 위해서 사용되던 의례용기인데요. 잉카인들은 안데스의 고대문명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케로를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재 탄생시켰어요. 잔의 표면에 기하학적 무늬를 새기거나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로 만들기도 했어요.


잉카의 두개골 변형과 절개술

예로부터 세계 각지에서는 특별한 목적으로 사람의 머리뼈를 변형시키는 풍습이 있었어요. 특히 안데스 문명의 지역에서는 잉카시대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였지요.

변형방식은 앞 뒤의 머리에 판자나 쿠션을 대서 압박하여, 머리를 편평하게 하는 방식과 머리 주변을 띠 등으로 묶어서 두개골은 위 아래로 길게 늘이는 방식이 있었답니다. 이렇게 머리를 변형하는 것은 종교적, 또는 신분의 표시를 위해서 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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