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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 존 헤론 ② 조회수 : 3075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6-06-18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 존 헤론 John W. Heron

양화진 묘역 최초 선교사이며 고종의 시의를 지낸 헤론은 1884년 4월, 최초의 장로교파 한국선교사로 정식 임명되었으나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일본에서 1894년 4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머물다가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알렌(H. N. Allen)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로서 가선대부 벼슬을 하여 혜참판이라 불렀다.

그의 업적은 우리나라에서 병원사업과 성서번역사업을 비롯하여 기독교 문서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 출판을 위하여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 상림위원 4인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 6월 25일 기독교서회를 창설하였다.
기포드 선교사는 헤론의 인간성에 대하여 1897년 코리안 레포지트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정신과 인술로서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그는 조선과 조선인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사람이었다."

헤론은 1890년 7월26일 한국에 온 지 5년 만에 이질로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양화진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로 결정되기까지는 긴 사연이 있다. 즉 헤론이 별세하자 미국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 논의 끝에 양화진을 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한국정부에 요청하였다. 양화진은 본래 선교사들이 자기네 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양화진이 묘지로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동에 있는 미국공사관내에 임시로 묘를 설치하니, 백성들이 크게 반대하였다. 도성 안에 시신을 묻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외교적인 차원에서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5개국 공사의 공동 명의로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청원하여, 1890년 10월 24일 한국정부의 허락을 받은 후 헤론의 시신을 이장하였다.

전택부 선생은 "양화진 묘지를 고종이 수락한 것은 외교 공세와 자기 아버지 대원군이 저지른 천주교도들에 대한 죄과를 속죄 받는다는 뜻에서 특혜를 내린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헤론이 별세한 뒤 그의 미망인 해티는 남편 헤론과 가까웠던 친구인 게일 선교사와 1892년 재혼하여 곤당골에 신방을 차렸다. 이 때 게일은 노총각으로 30세였고, 해티는 33세의 미망인이었으며, 헤론의 아이가 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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