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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조선의 어머니로 살았던 대부인. 스크랜튼 ② 조회수 : 2920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6-07-16
조선의 어머니로 살았던 대부인. 스크랜튼 Mary F Scranton ②

19명의 여성으로 시작된 주일학교는 여성들만의 주일예배로 발전되었으며 1889년 2월 12일 한국 최초로 여성 교회(Woman"s Church)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1891년 이화학당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학당장 직책을 로드와일러에게 물려주고 3월 18일 1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2년 5월 다시 서울로 돌아온 스크랜턴 대부인은 1891년 1월 4일부터 시작된 동대문 선교사업에 합류해 미감리회 여선교사들과 함께 여성들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아들 스크랜턴이 1894년 선교지역을 정동에서 상동으로 옮기고 선교활동을 벌여 나갔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자 거처를 상동으로 옮겨 직접 여인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상동지역의 여성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상동지역의 여성들에게 복음 전도활동을 전개하는 것 이외에 매일학교를 설립하여 여자아이들을 가르쳤고, 1890년대부터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기성경교육을 시작하였는데, 후에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로 발전하였다.

1898년에 2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유럽으로 떠났던 스크랜턴 대부인은 1900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노령인 관계로 회복이 늦어져서 1904년 10월에야 다시 귀환할 수 있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1893년 여성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지방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를 통해 여성문맹이 퇴치되고, 여성의 생활이 변화하였다. 1900년 수원ㆍ공주구역에는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만한 인력과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여성선교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는 여성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선교 지원금을 선교부에 요청하고 교사를 발탁해 교육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1906년부터는 진명여학교에서 일주일에 이틀 아침 시간을 할애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1907년에는 상동교회 내에 있는 공옥여학교와 무지내여학교, 그리고 덕고개에 있는 여학교 외에 수원에 있는 여학교까지 포함해서 네 곳의 여성 매일학교를 감독하였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도움을 베푸는 대단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국 감리교회 선교사로 내한한 지 25년째 되던 해인 1909년 10월 8일 새벽, 향년 77세의 나이로 상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한국 여성 교육의 개척자로,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자신의 후반 생애를 바쳐 일구어낸 땅, 한국에서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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