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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교육과 교화에 생애를 바친 벙커선교사 조회수 : 3057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6-09-24
교육과 교화에 생애를 바친 벙커선교사 Dalzell A Bunker

벙커(D. A, Bunker 房巨) 선교사는 1853년 8월 10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883년에 오하이오주의 오벌린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이 무렵은 조ㆍ미조약(1882)이 체결된 후여서 조선정부는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하고, 미국측에 교사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공사 푸드의 주선으로 국무성을 통하여 유니온 신학교에서 벙커, 길모어, 헐버트 등 3인이 선발되어 1886년 5월 미국 북장로회 교육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했다.

벙커는 육영공원에서 고관의 자제들과 관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1887년 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와 결혼하였고, 육영공원이 폐쇄될 때(1894)까지 8년간 교사로 봉직했다. 그 후 배재학당으로 옮겨 미국 감리회 소속의 선교사로 활동했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1902) 후 배재학교의 학당장이 되어 1911년까지 교육발전에 열성을 다하였으며, 후임자 신흥우에게 교장 자리를 인계했다. 그는 종래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을 개선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1892년 3월에는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 호조참의> 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1896년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될 때 윤치호가 작사한 국가를 스코틀랜드 민요 ‘작별’에 맞춰 학생들에게 부르게 하는 등 한국 최초의 애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즉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이 곡에 맞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고 애국가를 부른 최조의 사람이 벙커선교사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옥중전도를 통하여 인권을 보호하고, 민족 지도자들을 개종시켰다. 1902~1904년 독립협회의 지도자 이상재 남궁억, 그리고 이승만 신흥우 등이 투옥되었을 때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감옥을 출입하면서 그들의 석방운동을 펴는 한편, 매주 수감자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고 신앙상담과 예배를 드렸다. 옥중전도와 연계하여 감옥 안에 학교가 개설된 사례도 있었다.

한편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하여 시해된 후 고종황제가 극도의 불안 상태에 있을 때, 벙커, 게일,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가 번갈아 왕실에 들어가 고종 황제를 호위하면서 왕의 신변보호에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 후 1926년 7월 4일 73세의 노령으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여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1932년 80세로 샌디에이고에서 숨을 거두면서 "나의 유골은 한국 땅에 묻어 달라" 유언하여, 정동감리교회에서 고별예배를 드린후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 (날이 새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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