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사람들
•홈  >  쉴만한물가  >  믿음의사람들

목록보기

  제  목 : 마리 위더슨, 그리고 프랭크 M 브로크만 조회수 : 3343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6-09-24
위더슨 1898년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한 마리는 1924년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에서 살았으며, 구세군 사관학교를 거처 부교가 되었다. 그 후 아프리카에서 크리스 위더슨과 약혼하고, 1927년 한국에서 결혼하였다.

그녀의 남편 크리스 위더슨은 한국 구세군 사령부에서 8년간 봉사하다가 1934년 한국을 떠났다가 6.25 전쟁 때 구세군 한국 사령관으로 다시 파송되었다. 마리 위더슨은 그때 남편과 함께 와서 일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전쟁 고아들의 친구가 되었다. 고아들은 거리에서 데려온 아이들이기 때문에 병균이 많았고, 그리하여 아이는 물론이고 남편과 자신은 자주 발진티부스로 앓아 눕기도 하였다.

그후 그들은 아프리카 케냐에서 7년간 봉사하다가 다시 내한하여 전쟁중에 무너지 한국 구세군을 다시 조직하였다. 이때 남편은 구세군 사령관, 부인은 고아원 원장 겸 가정단 총재가 되었다.
그후 위더슨 부인은 위암으로 투병 중에도 크리스마스 자선냄비 때에는 거리로 나와 전도지를 뿌리고 동료들을 격려하였으며, 1956년 5월 10일 별세하였다.

죽기 전에 그녀는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다"라고 하면서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녀는 지금 양화진에 짐들어 있다.
브로크만 YMCA 운동가였던 브로크만은 1878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에 내한하여 결혼하 후 24년간 한국에서 일했다. 그는 YMCA 학생부 간사와 총무로서 이승만과 함께 상류 지식층 청년들을 상대로 YMCA 운동을 하였다, 한국교회가 서민 중심의 교회였기 때문에 지식층을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광주 숭일, 전주 신흥, 군산 영명, 평양 숭실, 선천 신성학교 등을 순회하며 YMCA 학생조직을 성공적으로 하였다. 그후 105인 사건이 일어나 윤치호는 6년 징역, 질넷트 총무는 국외추방. 이승만 김규식은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브로크만은 이 사건을 수습하였으며, 고종황제 강제 퇴위로 실망하여 자결하려는 이상재를 만류하기도 했다. 1913년 이상재와 브로크만이 YMCA 총무와 부총무를 할 때 이상재는 64세, 브로크만은 36세였는데, 멋진 조화를 이루며 활동하였다. 그는 1923년 신흥우와 함께 농촌운동도 시작하였다.

1929년에 과로 때문에 중병에 걸려 귀국하여 프린스턴에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프린스턴신학교 주최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 라 친구들에 의하여 한국으로 이송되어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24년간 한국의 증인, 일꾼, 평화의 사람, 한국인의 친구로 살았던 프랭크의 무덤>이라 쓰여 있다. 그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

  이전글 : 교육과 교화에 생애를 바친 벙커선교사
  다음글 : 영광스런 가문 젠소선교사 가족. John ...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