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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미국 남 감리회의 첫 여선교사, 조세핀 P 캠벨... 조회수 : 2926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6-10-29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미국 남 감리회의 첫 여선교사, 배화의 초석, 조세핀 P 캠벨-

양화진에는 미국 남감리회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화학원과 종교교회, 자교교회를 설립한 조세핀 P. 캠벨 선교사 묘지가 있다. 그녀는 21세가 되던 해에 캠벨목사와 결혼하여 1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6년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자녀들도 수년 내 모두 잃은 비운의 여성이었다.

이 같은 불행 속에서 그녀는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며, 일생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공헌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의 간호원 양성소에서 간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외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1886년 미국 남 감리회 해외 선교사로 선임되어 중국의 상해 소주 등지에서 10여년 간 봉직하였다.

그후 미국 남감리회의 해외여선교부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여선교사로 1897년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였으며, 한국으로 오면서 중국인 양녀 여도라를 데리고 왔다. 여도라는 한국에서 간호사로, 교사로, 전도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캠벨의 선교사업을 훌륭하게 조력했다.

한국에 도착한 캠벨 선교사는 고가나무골에 있는 이항복의 집터에 선교지를 정하고 여성기숙학교를 육성했다. 이것이 ‘배화학당’ 창설이다. 이때 교사는 2명이었고, 과목은 한글과 한문이었으며, 학생은 6명으로 첫 학생은 선교사 사택 수위였던 박씨의 딸이었다. 다른 학생은 캠벨이 순회 전도하며 데려온 아이들이다. 초기 수업 때 캠벨은 영어로 밖에 말할 수 없어 손짓 발짓 무언극으로 표현했다.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했다. 그 후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인가를 얻어 졸업생을 정기적으로 배출했다.

한편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기도실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1901년에는 배화학당 안에 미국에서 루이스 워커가 보내준 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이라 했다.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 모임이 오늘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도 주력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하나님 중심’ 신앙을 지니고 사역에 힘썼다. 그러던 중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되돌아오려고 준비 중 신병을 얻었다. 주위 친지들은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을 권유했으나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이로 인하여 1920년 11월 12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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