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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을 소명으로 안 베델.. 조회수 : 2723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6-12-27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을 소명으로 안 언론인, 베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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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제1묘역에는 영국의 데일리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지 의 특별통신원으로 내한하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의 묘가 있다. 그는 1872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출생하였으며, 1888년 도일하여 고베에서 동생과 ‘베델 브러더스 무역상’을 설립해서 사업을 확장하였으나 같은 업종의 일본인 경쟁회사의 방해와 3차례의 고소로 인하여 사업에 실패한 후 1904년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으로 임명되어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왔다.

베델은 1904년 4월16일자 신문에 경운궁 화재를 일제의 방화로 고발한 <대한제국 궁중의 폐허>라는 기사를 처음이며 마지막 특종으로 실은 후 해임되었는데, 해임사유에 대하여 베델은 “크로니클지의 지시는 그 신문의 편집방향이 일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내가 보내는 기사도 친일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의 사정을 직접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신원 직책에 사의를 표하였고, 크로니클은 나를 해고했다. 그후 특파원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후 1904년 7월 14일, 대한매일신보 창설자 및 사장으로 취임하여 양기탁, 신채호 선생과 대한매일신보의 한글판과 영자지 창간호를 냈다. 이 신문은 항일투쟁의 대변자 기능을 담당했는데, 특히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 황제의 친서를 신문에 게재하여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그는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다.(My fight for Korea is heaven ordained.)라고 말하며, 일본의 침략 정책을 맹렬히 비난하였고, 한국인의 의기를 돋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그후 계속되는 언론탄압과 영국 정부의 압력, 신문사 간부들의 구속과 여러 차례의 재판, 경영난 등으로 1908년 5월 27일 신문사에서 물러났으며, 이러한 충격으로 건강(심장병)이 악화되어 1909년 5월 1일 서울에서 37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가 죽자 고종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라고 탄식했고, 양기탁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국의 남자가 한국에 와서, 한 신문으로 깜깜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도 급히 빼앗아 갔나,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이라는 시를 썼다.

양화진에는 대한매일신보사장 대영국인 배설지묘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 뒷면에 쓴 추모의 글은 일제가 망치로 쪼아 지워 버렸는데, 광복 후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옆자리에 다시 건립했다. 한국정부는 1968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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