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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한양반과 천민의 신분체도 철폐를 위해 헌신한... 조회수 : 2559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01-22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한양반과 천민의 신분체도 철폐를 위해 헌신한 무어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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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는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승동교회 등 많은 교회를 설립했고, “백정 해방운동의 지도자”라는 호칭을 받을 만큼 천민의 권익을 옹호했다. 그리고 그의 집은 늘 한국 서민들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1860년 9월 15일 미국 일리노이 그랜드리지에서 목사 아들로 출생한 무어 선교사는 1889년 몬타나대학을 마치고,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후 무디의 부흥운동에 감동을 받고 선교사로 지망했다.

1892년 9월 21일 부인 로즈 엘리와 함께 한국에 도착한 후 여자들은 가마를 타고, 남자들은 걸어서 성안으로 갔다. 남대문에 도착해보니 이미 성문은 닫혀 있어 성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는데, 성벽 아래쪽에 개구멍이 있어 브라운 아들은 거기로 기어 성안으로 들어갔으나 어른들은 체구와 체통 때문에 시도조차 못했다. 하는 수 없이 6m 되는 높은 성벽에 로프를 걸어 벽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서울에 도착한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국어를 배우는 일부터 착수했다. 한국어 선생을 두고 매일 방문하도록 하여 공부했다. 이 무렵 그는 한국어를 배우는 일 이외에 마펫(Moffett)선교사의 성경공부 반을 도왔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성경을 장과 절까지 말하며 척척 외우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혀여 더욱 열심히 가르쳤다. 얼마 후 그의 한국어 실력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급속히 늘었다.

1893년 6월에는 곤당골에 2층집을 지었는데, 무어 부인은 집 구경하러 온 이웃 아낙네들에게 재봉틀을 보여 주며 그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환심을 샀다. 약 9m 깊이로 판 우물은 다른 집보다도 수질이 좋아 이웃사람들과 나누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선교활동을 하면서 어느 해에는 100명에게 세례를 집례 하기도 했다. 특히 서울에서 백정을 대상으로 많은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양반과 천민이 함께 예배하도록 하는데 전력하였다

1896년 에비슨 선교사와 협력하여 신분제한 철폐와, 천민의 권익 보장을 위해 고종 임금에게 탄원하기도 했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복장제한 제도를 철폐하여 양반과 천민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데 기여했다. 이 같은 그의 업적으로 인하여, 무어선교사를 <사랑의 사도>라고 불렸으며, 천민층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승동(곤당골)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25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등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서 15년간의 선교사역을 중단하고 제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1906년 12월 22일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우리말로 <조선 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다.>라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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