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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구세군의 5대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토프트선교사 조회수 : 2790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01-30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구세군의 5대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토프트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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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랜드 등 북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및 인도 북부지방 사령관 등으로 40년간 봉직하다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에서 그의 일생을 마친 토프트 선교사는 1926년 8월 제5대 한국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내한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육아원 음악대와 많은 인사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은 토프트선교사 부부는 곧바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관회의를 주재하며 복음을 전하는 등 바쁜 일정을 시작했다.

<한국구세군사>에 따르면 지방 순회 첫 일정은 1926년 9월 4일, 고산지방을 시작으로 10일에는 충북 영동의 심천과 주곡, 11일부터 대구, 영덕, 13일에 의성, 26일에 충남 홍성, 29일에 개성을 순회하였고, 10월 7일 전주, 14일 해주 등을 두루 순회하며 회의를 주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살인적인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1926년 11월 4일에는 세계 구세군을 통괄하는 브람웰 부우드 대장 일행이 방한하였다. 부우드는 서울에 도착하여 자동차 위에서 “구세군은 인종, 계급 상하를 불구하고 흑암 중의 죄인을 구원하고, 욕심, 술, 도박보다 큰 힘을 준다.”고 설교하였다.
그런데 부우드 대장의 한국 방문기간 중 구세군 분규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 사관들의 대우에 대한 불만으로 허곤 윤수만 등이 20개 항목으로 된 진정서를 낸 사건이었다.

진정 내용에는 한국인 사관의 참모권 부여, 차별 대우의 개선, 만행 사관의 축출과 선행 사관의 승진, 생활비 인상 요청 등이었다. 부우드는 이 사건에 대하여 유감을 표시하고 분규행동은 비복음적, 비구세군적이라 지적하고 떠났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20여명의 사관들이 면직되었으며, 토프트선교사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구세군의 명예를 손상시킨 충격으로 병을 얻고 말았다.

이것은 그가 한국에 부임한지 2개월 반 만에 겪는 엄청난 사건이었으며, 책임이 그에게만 있는게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과중한 정신적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치료와 간호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결국 별세하고 말았다.

그는 구세군 사령관 재임 기간 중 정동사관학교, 대구군영, 해주군영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쿠퍼는 ‘그가 우리 지방(해주)에 여러 영문을 방문하여 주신 것을 심히 기뻐하며 전하신바 복음과, 끼치신바 모범과, 감동과 감화는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토프트 선교사는 부임한 후 자신을 살필 겨를도 없이 지방을 순회하였으며, 태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피곤한 내색도 하지 않고, 기쁨으로 일하였으며, 곧고 바르게 일한 열정적인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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