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사람들
•홈  >  쉴만한물가  >  믿음의사람들

목록보기

  제  목 : 구세군선교사로 헌신한 스웨덴 출신의 에이커홈 선교사 조회수 : 3018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02-05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구세군 선교사로 헌신한 스웨덴 출신의 에이커홈 선교사 부부
***********************************************************************************************

스웨덴 출신의 에이커홈 선교사는 1914년 3월9일 구세군 사관으로 내한하여 처음에는 개성 지방관으로 봉직하던 중 스웨덴에서 함께 내한한 구세군 선교사 뽁비스트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식에는 동ㆍ서양 사관들이 많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에이커홈 부부는 1918년 6월 개성에서 특별 부흥회(전도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새로 설립된 전기회사의 지원을 받아 전깃불과 촛불등화를 겸비한 행사로 구경꾼들이 전에 비하여 배나 되었다. 이때 일곱 차례의 애배를 통하여 1,430명이 복음을 접하고, 31명이 회개하였으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후 에이커홈 선교사는 충청북도 지방관으로 전임되어 선교사업을 계속하였다. 이때 그는 사재를 출연하여 조성한 기금으로 영동병원을 설립하여 농촌지역에 의료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충청북도 지방 활동 중 1920년 3월 15일 장티푸스로 인하여 32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스웨덴 출신의 구세군 사관으로는 세번째로 순직한 선교사였다.

양화진에 세워진 그의 묘비에는 “朝鮮忠淸北道 救世軍地方營 族官 玉居欽 主降生 一八八八年 三月 十三日生 一九二十年 三月 十五日 別世(조선 충청북도 구세군 지방영 옥거흠 주강생 1888년 3월 13일생 1920년 3월 15일 별세)라 쓰여 있으며, ”復生者 我生命者 亦我信者 雖死必生而 信我者 永不死爾信否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을 입게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하셨으니 우리 대신 죽으시어 저와 함께 살게 하시니라)”라 기록되었다.

또한 스웨덴 출신의 여성 사관으로 내한하여, 에이커홈과 결혼한 뽁비스트선교사는 남편이 별세한 뒤에도 한국에 머물면서 구세군 선교사로서 활동을 계속했는데, 전도를 위하여 성경과 찬송가를 자비로 사서 나누어 주었으며, 함경도 고산구역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구역관 취임식에는 서기장관 등 많은 구세군 사관과 병사들이 참석하였다. 이때 4명의 새로운 회개인이 있었으며, 병사대표(리종삼)는 환영사에서 “마음과 뜻을 더욱 다하여 구역관을 도와서 고산뿐 아니라 함경남ㆍ북도에 널리 구세군기가 날리도록 힘쓰겠다.”는 열렬한 환영사가 있었다.

한편 1926년 구세군 분규 사건 때에는 한국 사관들이 제출한 진정서 중 제17항에 에이커홈 부인에 대한 조항을 넣어 기피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28년 서울 정동에 구세군사관학교가 개관될 때는 여성사관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선교사역을 위하여 폭넓게 일하던 중 본영 사관부인들로 조직된 자선위문단 책임관, 선교사휴양관장, 사회사업부 등에서 봉직하였다. 1940년 12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출국되어 스웨덴에서 별세하였다.

 "

  이전글 : 구세군의 5대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토프트선교사
  다음글 : 복음전파를 가장 큰 기!쁨로 여긴 선교사, 윌리엄 리처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