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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복음 전파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긴 윌리엄 리처드 조회수 : 2718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02-22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복음 전파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긴 선교사, 윌리엄 리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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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에는 미국 북장로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된 부부의 묘 자리가 있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에서 성서와 음악 교수로 활동한 R. C. 코엔부부인데, 미국에서 세상을 떠나 묘지는 정해졌지만, 아직 이 땅에 와서 묻히지를 못하고 있다. 그 옆자리에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경ㆍ충노회 산하에서 여러 교회의 교역자로 폭넓게 활동하고, 선교역사 편찬위원과 예수교서회 실행위원 등으로 한국에서 30년간 활동했었다. 코엔 선교사는 미국에서 시카고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8년 10월 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서울 연지동에 거주하면서 많은 선교 활동을 했다.

노량진교회에서의 활동을 비롯하여, 광주 신사리교회와 진촌교회에서 시무하였고, 용인의 아곡교회, 시흥 삼성교회, 안성 안성읍교회, 방축리교회, 대갈리교회에서 당회장 등으로 시무했다. 그리고 광주 용수리교회와 용인 문촌교회, 아고리교회에서 사경회 강사로 활동했고, 이밖에도 수많은 교회에서 사역하였다.

그리고 미국북장로회선교역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노해리 선교사를 도와 “The Korea Misson Field”의 편집에도 참여하는 등 문서선교에도 크게 헌신하였다. 또한 조선예수교서회 실행위원과 한국에 있는 중국인 선교사업 감독으로도 활동하였다.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서 성서와 영어를 강의했으며, 재단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연세대교수로 재임하는 기간에는 인접하여 있는 서교동교회 교역자로 겸직하면서 당회장 직무를 비롯하여 성례와 성찬식을 집례하고, 구역을 조직하여 가정기도회를 갖게 하였다. 또한 교인을 통하여 12집사를 민주적으로 뽑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섬기게 하므로 민주적 교회행정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42년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출국되었다가 1946년 다시 내한하여 서울에서 선교사업 복구활동과 영락교회의 맹인선교사업을 지원했다. 조선기독교연합회(NCC) 대표로 참여한바 있으며, 그 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48년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양화진 제2묘역은 코엔 부부의 묘지로 예정된 땅이 있지만, 지금까지도 빈자리로 남아있다. 할 수만 있다면 믿음의 후배인 우리가 그분들을 아들 옆으로 모셔서 선교의 기념장소로 삼았으면 한다.
메리 B. 코엔 부인은 미국에서 R. C. 코엔과 결혼하여,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내한하였다. 그녀는 한국에서 남편의 선교활동을 열심히 내조하면서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음악을 가르쳤다.

코엔 부부는 M. S. 코엔을 낳았는데, 1919년 2월 23일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역에는 작은 비문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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