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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양화진에 안치된 구세군 최초의 선교사, 소피아 프릭 조회수 : 2614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03-19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양화진에 안치된 구세군 최초의 선교사, 소피아 프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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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 제1진은 프릭, 코흘러, 울선 등 3인으로 1911년 12월 24일 내한하였다. 이 중 프릭 사관은 한국에 파송된 구세군 선교사 중 최초로 1912년에 양화진에 묻혔으며 코흘러는 다음 해에 안장된 독신 여성 선교사이다.

1886년 스웨덴에서 출생한 소피아 프릭은 스톡홀름 구세군 성경대학교에 입학하여 참위 직분을 받은 후 곧바로 한국 구세군 선교사로 선임되어 1911년 12월 24일 내한하였다. 스웨덴의 연대장 뷔버는 프릭을 한국에 파송하면서, ‘프릭은 성령이 충만한 젊은 여성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위하여 좋은 사업을 크게 이룩할 수 있는 선교사’라고 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프릭은 서울 평동에 머물면서 한국말을 익혀 빠른 기간에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함께 내한한 구세군 선교사들에게 “나는 도저히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갈 것 갖지 아니하며, 오직 한국에서 살다가 한국인을 위하여 죽을 줄로 믿는다.”고 했다.
그는 쪽 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눠주며 문서전도와 노방전도에 힘썼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기도와 성경 공부를 한 뒤, 7시에는 뒷산에 올라가 한국인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때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한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선교사로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던 프릭이 1912년 4월 18일 급성 뇌염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의사의 극진한 진료와 호가드 사령관 부인 등 여러 사관들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았으나 1912년 4월 29일 순직하거 말았다. 그와 함께 생활하던 본영 총무서기관 크리스핀은 프릭 선교사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프릭 사관과 한 대문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를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오전 일곱 시쯤이면 성경을 들고 집 뜰 주변을 거닐었다. 궁금하여 그에게 하루의 생활을 물었더니 그는 매일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으므로 이를 실천한다고 했다. 또한 이른 아침에 자주 높은 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한국을 위하여 기도한다고도 했다. 한국인을 구원하여 주님의 빛을 발하도록 하려는 생각만 간절하다고 했다. 또한 구세 신문과 마가복음을 자기 돈으로 사서 여러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므로 칭송이 그치지 아니한다.”고 했다.

프릭 선교사는 한국 체류 활동 기간이 4개월에 불과하지만 참으로 훌륭한 삶을 살다가 간 선교사였다. 그의 장례식 때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진심으로 슬퍼하였으며,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최초로 순직한 구세군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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