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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한국과 한국인의 친구,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 터너선교 조회수 : 2631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03-25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한국과 한국인의 친구,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 터너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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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영국 솔즈베리에서 출생한 터너는 1885년 옥스퍼드의 키블대학을 졸업한 후 옥스퍼드 교구에서 성공회 부제로 서품되었고, 1888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896년 12월 2일 영국성공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대성당에서 코프 주교를 보좌하였으며, 공덕동성당과 인천성당에서 봉직하였다.

1904년 7월, 초대 주교였던 코프가 사임하게 되어 터너는 그 후임으로 1905년 1월 25일 제2대 한국 주교가 되었다. 터너 주교의 한국 선교 활동 시기는 한 민족의 수난기였다. 1904년 을사 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실제적으로 한국을 점령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철저한 지배와 효과적인 통치를 위하여 경비 절감이라는 명목으로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때 한국인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서울을 비롯한 각처에서 항쟁이 계속되었다.

이같은 시기에 터너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일본이 취한 정치적 조치가 옳던 그르던 간에 한국 백성들을 평화적이고,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로는 한국인에게 기독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가지지 못한 확고한 입장과, 목적의식을 확보할 수 있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진솔한 신앙을 배우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교회만이 한국인의 희망이 될 수 있고 이 때가 선교활동에 있어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한국 성공회 자립에 힘쓰면서 겸손한 인격과 통솔력을 발휘하며 수원과 진천까지 선교 범위를 확장하였다. 한편 여성 교육에도 힘썼다. 1908년 5월 25일 강화 온수리에 새워진 <마리아여학교>가 그 효시이다. 그는 ‘현숙한 여성’이 되도록 교육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을 비롯하여 고아원과 학교도 자립시켰다.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설립하여 실업(實業)교육을 실시하고, 교회조직과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다른 한편 YMCA의 창립준비 작업에 참여하고 1903년 초대 이사와 체육위원회 위원장으로 봉직하였다. 1906년에는 게일의 후임으로 황성기독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한국에 축구를 도입 발전시킨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08년부터 “宗古聖敎會月報(종고성교회월보)”라는 월간지를 발행 보급하며, 투철한 신앙을 키워 나갔다.

그는 1896년 내한하여 왕성하게 교회 발전과 교회의 체제를 정비하였고, 1910년 10월 28일 인천 성 누가병원에서 신병으로 별세하였다. 유해는 기차 편으로 서울에 운구 되어 수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치른 후 양화진의 성공회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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