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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YMCA 직업교육과 농촌, 학생운동의 개척자. 브룩크만 조회수 : 2604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04-02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YMCA 직업교육과 농촌, 학생운동의 개척자. 브룩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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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M. 브록크만은 1878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으며, 네브래스카 오마하 YMCA 학생부 간사로 활동하던 중 1905년 내한하여 한국 YMCA 부총무로 봉직하면서 직업교육을 주도했다. 직업교육 과정은 목공, 철공, 화공, 염색, 그림, 도자기, 제화 등 전문교육이었다.

이 무렵 직업교육은 새로운 전문직을 창출하기 위한 교육이었다. 특히 강연회와 토론회는 큰 성과가 있었다. “산업교육의 필요성, 과학교육의 필요성, 산업의 기능과 국가 발전, 기업과 사회 발전, 복지사회의 건설” 등 다양한 주제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으며 청년들의 사회 참여를 유도했다.

그 후 브록크만은 1908년 황성기독청년회에서 공동총무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4년, 조선중앙 YMCA와 9개 학생 YMCA 등을 포함하여 조선 YMCA연합회(현, 한국 YMCA연맹)를 조직하여 초대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승만 박사와 함께 상류 지식층 청년들을 상대로 YMCA 학생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민중심의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식층을 수용하기 위하여 활동했다. 평양의 숭실학교, 선천의 신성, 광주의 숭일, 전주의 신흥, 군산의 영명학교 등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 YMCA를 조직했다. 1910년 6월에는 최초의 학생 하계수련회를 여는 주역을 담당했다.

1911년 6월에는 개성에서 전국 21개 학교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회 하계수련회를 개최했는데, 이 일로 인하여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다.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모의했다는 것이다.
105인 사건은 1911년 11월 11일 선천 신성학교 학생과 선생을 검거하여 서울로 압송한 사건 등에서 비롯된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인하여 YMCA의 저다인 회장은 강제 사면되었고, 질레트 총무는 국외 추방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브록크만은 YMCA 사업에 너무 열중하다가 35세 때 친구들의 권유로 늦은 결혼을 하였다.

그 후 1916년부터 YMCA의 협동 총무로서 1922년까지 청소년 교육에 힘썼으며, 1919년에는 선교잡지 《조선 청년》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신흥우 총무와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미국 국제 본부를 방문하여 1925년부터 10명의 농촌 기술자를 미국과 캐나다에서 파송 받고, 재정 원조도 약속 받기로 하는 등 성공적인 과업을 이룩했다. 그가 주도한 지도자협의회는 농촌운동 역사상 획기적인 것이었다.

1927년, 과로로 인한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한 후 1929년 6월 10일 미국에서 별세하여 프린스턴신학교 장으로 집례되었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으로 돌아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 땅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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