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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한국전쟁을 겪으며 교회를 함께 지킨 챠드웰 조회수 : 2779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04-16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한국전쟁을 겪으며 교회를 함께 지킨 챠드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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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성공회 차드웰 주교를 비롯하여 한국 스포스의 선구자 터너성공회 주교의 묘가 있다. 이곳에는 성공회 초대 관리인 신문홍과 그 조부 신대성 묘도 있다. 이 묘는 가장 오래된 묘라고 할 수 있다.

아더 E. 차드웰은 1892년 8월 1일 영국 햄스테드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런던대학과 처선트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사제로 서품된 후 1926년 내한하여 1928년까지 충북 진천에서 활동하였고, 1931년까지는 북한의 배천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는 평양에서 성공회 사제로 봉직하였다.

그가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일제는 영국 선교사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일본이 일으킨 중국 침략 전쟁을 강력한 항의 성명으로 발표하였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그 첫 번째 피해자인 차드웰은 1940년 7월 24일 외환관리법 위반과 단파 라디오를 소지했다는 죄목으로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쿠퍼 주교도 같은 해 8월 10일 연행되어 4일간의 구류를 살았다. 차드웰은 1941년에야 석방되어 한국에서 제일 늦게 강제 추방된 선교사가 되었다. 그가 한국을 떠난 뒤에는 스리랑카와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8·15 광복이 되어 1946년 다시 내한하여 청주에서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0년 6·25 전쟁 기간 중 7월 18일 간첩 혐의로 공산군에 체포된 쿠퍼 주교가 납북되자 그를 대신하여 차드웰이 성공회를 지켰다. 이에 따라 캔터베리 대주교는 공백기의 책임을 차드웰에게 맡기기로 하고,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 후 교회(성공회)들은 차드웰의 목회 지도아래 전쟁의 상처를 씻으며 건실하게 성장해 갔다.
여기에는 한국인 성직자들의 노력이 매우 컸다. 차드웰 주교는 1953년 5월31일 서울대성당에서 1949년 이래 처음으로 부제성직에 김태순과 윤주현을, 사제성직에 이천환과 김경득을 각각 안수하였다. 그 후 이천환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75년간의 선교사 시대를 마감하고 1965년 5월 27일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성공회 주교로 임명되어 서울교구를 창립한 인물이 되었다

1955년 차드웰은 주일복음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선교 활동에서 출판물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은퇴 후에도 인천성당에서 1년간 봉직하였다.
한편 한국전쟁 중 체포되었던 쿠퍼 주교가 1953년 11월 14일 귀환하였으나 1955년 1월 16일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뒤 사임했다. 그리고 새로운 한국 주교를 물색하여 1956년 1월 17일 아프리카 가나의 교구장이던 데일리가 한국 교구의 제5대 교구장으로 전임 발령되었다.

차드웰 선교사는 1967년 11월 21일 부산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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