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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한국전쟁과 교육사업에 빛을 발한 윌리엄 쇼 .. 조회수 : 3171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10-20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한국전쟁과 교육 사업에 빛을 발한 윌리엄 쇼 선교사 가족******************************************************************************************
미 감리회 선교사인 윌리엄 E 쇼 선교사는 1890년 8월 22일 시카고에서 출생하여,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과 콜럼비아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선교 사업에 뜻을 두고 한국 선교사가 된 다음 보스턴 신대원을 졸업하였다. 1921년에 내한한 후 평양에서 광성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만주와 해주 지방에서 교육과 전도사업에 몰두하였다. 1938년 무어선교사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 단장으로도 봉사하였다.

1941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출국되었다가 1947년 다시 내한하였다.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에는 미군 군목으로 종군하면서 피난 교역자 구호에 힘썼으며, 특히 한국군 군종 창설에 크게 기여하였다.
외아들 쇼 해밀턴이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자 5,925명이 보내준 14,500불의 헌금으로 쇼 기념교회를 대전에 건립하였다. 1955년 목회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쉐파트 부인이 헌금한 6천불을 기초로 목자관을 건립, 관장으로 봉직하였다. 감리교대전신학원(목원대) 창립 이사로 참여하고 신약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크게 존경을 받았다.

1961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뒤, 귀국하여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병원에서 별세,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부인이 안고 와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부인 아데린 H 쇼 선교사는 1919년 7월 4일 윌리엄 쇼와 결혼한 후, 1921년 남편과 함께 내한하여 숭덕여학교 교사 등으로 1960년까지 교육에 헌신하였다.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 남편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윌리엄 E 쇼의 아들인 윌리엄 해밀튼 쇼는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진격 해군 장교로 참전 후, 미군정청 소속으로 내한하여, 한국 해군과 해병대 창설에 기여하였다. 해군에서 제대 후 한국 선교사를 목표로 하버드대학에서 연구하다가 6·25가 발발하자 한국 해안지역의 취약한 방위 상황을 깊이 우려하고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싸우고자 해군 대위로 다시 입대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고, 서울 수복 진두 지휘 중 1950년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있는 "응암어린이공원"에는 백낙준 등 61명의 기념비 건립위원들이 1956년 9월 22일에 윌리엄 해밀튼 쇼의 전사지에 세운 추모비를 옮겨 놓았다. 비문에 요한복음 15:13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나니”가 새겨져 있다. 2001년 10월 20일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에 의하여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 좌대석이 추가로 놓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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