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홈  >  게시판  >  성지순례


내가 나를 알 수 없어 홀로 방황하는 / 안에 활활 타오르는 이 끝없는 갈증 /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방황과 포기 / 홀로 펄럭이는 영혼의 내 낡은 장막 / 훌훌 벗고 주님 앞에서 울며 걸었던 / 13일간의 아름다운 땅의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성서의 세계를 이곳에서 만나시기 바랍니다.

 "

목록보기

  제  목 : 로마 조회수 : 14038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15-01-31

로마


전설에 따르면 BC 753년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는 로마는 한 때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도시국가로 발달했고, BC 6세기 말에는 에트루리아계 왕을 추방하고 귀족에 의한 공화제를 실시함으로써 로마는 여러 라틴 도시의 맹주가 되어 고대 로마 국가의 중심이 될 기초를 닦았다.

현재 ‘종착역(테르미니)’ 부근에 그 일부가 남아 있는 세르비우스 왕의 성벽은 BC 4세기의 것으로, 이 무렵부터 로마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는 국가의 중심으로서 발전하였다. 270년경 제정로마 시대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축조한 성벽은 주위 46km에 이르며, 현재 그 대부분이 남아 있다.


 

마머티움 / 로마의 감옥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빌립보서 1:12~14

바울은 암반을 깎아서 만든 어둡고 음침한 마머티움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를 썼다.

마머티움 / 로마의 감옥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빌립보서 1:12~14

바울은 암반을 깎아서 만든 어둡고 음침한 마머티움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를 썼다.

콜로새움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플라비우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중세에는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으로 쓰였다. 로마 시민의 오락시설로서, 여기에서는 글라디아토르(검투사)의 시합, 맹수연기 등이 시행되었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m의 4층 구조이다.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으로 설치되어 있다. 콜로세움이란 명칭은 근처에 네로의 거대한 동상(colossus)이 있었던 데에 유래한다.

아피아 가도가 시작되는 곳


길이 50km. 너비 8m. 로마의 켄소르(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BC 312년에 건설을 시작한 도로이며, 도로명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처음에는 로마와 카푸아 사이의 50km였으나 BC 240년경 브룬디시움(브린디시)까지 연장되었다. 도로는 돌로 포장을 했는데 로마와 남이탈리아를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의 간선도로이기도 하였으며, 오늘날도 일부가 사용되고 있다.

로마에서 그리스 ·이집트로 가려면 먼저 이 도로를 통과하여야만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멸한 후 브룬디시움을 거쳐 이 도로로 로마에 개선하였다.

연도에는 도미네 쿠오바디스교회 ·성세바스티아교회, 역사적 인물의 묘터 등이 많이 남아 있다.

도미네 쿼바디스


네로 황제는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차 잔인·포악한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 어머니와 왕비 옥타비아를 차례로 살해하였다. 특히 브루투스의 병사와 세네카의 은퇴는 그의 난행의 도를 심화시켰다.

주후 64년에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전가시켜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그때 네로의 박해를 피하여 로마를 빠져나가던 베드로가 이곳에서 로마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만났다.

"도미네 쿼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를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다." 그 음성을 듣고 다시 로마로 들어간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하였다.

카타콤


카타콤은 원래 그리스어 ‘카타콤베’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하며, 로마 아피아 가도에 근접한 성 세바스찬의 묘지가 두 언덕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3세기에 이 묘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이 묘지뿐이었으나,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되고부터는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조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통로를 종횡으로 뚫어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 층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통로의 곳곳에 넓은 방처럼 만들어진 가족묘가 있어서 초대교인들은 이런 넓은 공간을 이용하여 집회를 하였다.

여기에 남겨진 수많은 벽화는 고대 이교미술과 중세 그리스도교 미술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예술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흥미롭다. 그 밖에 비명과 초대 그리스도 교도들이 예술의 상징으로서 그린 물고기 그림 등이 남아 있다.

사도바울 참수터 기념교회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잡기 위해서 다메색으로 가던 중 소명을 받고 사도가 된 후 세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고, 로마에까지 그 발자취를 남겼다.

로마에서 옥에 갇히는 등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하였으며, 그의 높은 학식이 더욱 빛을 발하여 그리스도교의 기초를 굳히는 데 크게 성공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바로 이곳에서 목베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바티칸 미술관


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 ·고문서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 ·장식으로 유명하다.

창설은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이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 ·도서관 ·성 유물관 ·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 또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 ·파오리나성당 ·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시스티나성당의 천정벽화


미켈란젤로의 천장벽회로 유명한 성당이다. 1508년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이 벽화를 그릴 것을 명령받은 그는, 먼저 화필로 넓은 천장에 기둥과 인방 등의 건축적인 구조부분을, 그리고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틀 안에 여러 장면을 그려 넣었다.

이런 식으로 1512년까지는 천장 중앙부에 《창세기》를, 그 주위에 《예언자》를, 그리고삼각형 모양의 요(凹)면벽과 반월형 벽면에 《그리스도의 조상》을, 그리고 네 모퉁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각각 그렸다.

1534년 그는 다시 바울로 3세의 위촉으로 정면의 제단화를 그렸다. 벽면전체를 상하 4층으로 나누어 7년에 걸쳐 위에서부터 천사,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심판의 장면, 묵시록의 7천사, 그리고 맨 아래층에는 지옥을, 지난번의 고전적 작품과는 다른 격렬한 터치로 표현하였다.

성베드로 대성당


이 성당을 건립할 당시 교황청에서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발행하였는데, M.루터가 면죄부 발행에 반대하여 그 폐단을 지적하는 등 <95개조 항의문>을 내붙이고 공개토론을 주장하는 등 종교개혁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였다.

성베드로 대성당


가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황청의 성 베드로대성당 관리청의 관리하에 있다. 그 역사는 깊어서 기원으로 말하면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르네상스의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다.

성 베드로광장

바티칸은 면적 0.44㎢. 인구 1,000명의 시국이다. 영토는 엄밀하게 말하면 가톨릭의 총본산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구역만이다.

바티칸 시국의 국기는 동시에 교황기이며, 오늘날의 국기는 1825년, 레오 12세 때 제정된 황색·백색의 2색기로, 백색 부분 중앙에 금·은 2개의 열쇠가 교황관을 받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광장에서는 부활절, 성탄절과 같은 절기에 특별한 종교집회가 열리는데, 이 때는 교황이 직접 이 집회를 집례한다.

황청의 근위병의 모습이다.

로마시내에는
이런 형식의 노천까페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베네치아 광장 / 에마누엘레 기념관


이곳은 많은 거리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에서 가장 복잡한 곳 중의 하나이다. 광장 정면의 커다란 백악관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Vittoriano)이다. 1885년부터 25년에 걸쳐 건축하여 1911년에 완성된 이 기념관은 이탈리아 통일(1870년)의 위업을 달성한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나폴리항


로마, 밀라노 다음가는 이탈리아 제3의 도시이다. 나폴리만 안쪽에 위치하는 천연의 양항으로, 베수비오 화산의 서쪽 기슭까지 이르고 있다. 따라서 시가는 동쪽으로 차차 높아지는 경사지에 입지하고, 토양은 비옥한 화산재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아열대산인 오렌지의 가로수가 끝없이 연속되는 모래 해안은 배후의 베수비오 화산과 더불어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어, 예로부터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는 유명한 속담이 전해올 만큼 세계적인 관광도시의 하나이다.

폼페이


지금은 내륙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江)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 ·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 연안의 고대도시 폼페이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 연안의 고대도시 폼페이

화석이 된 노예
이 사람이 노예인 것은
옷을 입지 않은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쏘렌토

나폴리만을 사이에 두고 나폴리와 마주하고, 배후에 오렌지, 레몬 등의 과수원이 펼쳐진 산지를 등지고 자리잡은 관광지인데,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의 나폴리 민요로 알려진 곳이다.

나폴리에서 쏘렌토로 가는 해변은 너무너무(!!!!) 아름다운 별장(?)과 까페들이 즐비하고 그 경치에는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불타는 로마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후서 4:6~8

네로는 주후 64년에 로마에 불을 지른 후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전가시켜서 수 많은 기독교인을 죽였다. 바로 그 로마를 향해 베드로가, 바울이, 그리고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불을 질렀다.

 "

  이전글 : 이스라엘
  다음글 : 2017년 영성순례를 소개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