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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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우리고장 역사기행 기행문 조회수 : 2476
  작성자 : 신새벽 작성일 : 2004-08-26

이천은 별로 큰 곳이 아니여서 목사님이 우리고장 역사기행을 가신다고 할 때 "어디를 갈 까?" , "이천에는 별로 갈 곳이 없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전 9시에 출발했다.

제일 먼저 본 것은 "아름다운 고인돌"이다. 다른 고장에 비해서 이천에는 아름다운 고인돌이 있다.특히 이 지역은 고인돌이 많이 나와서 지명도 "지석리"이다. 고인돌의 형식은 3가지(탁자형식의 북방식,큰 돌 밑에 조그만 돌이있는 남방식,밑에 아무 돌도 없는 무지석)가 있는데,이 곳에는 북방식 고인돌 1개와 무지석 2개가 있었다.

나는 왜 지도자만 고인돌을 썼을까? 라는 점이 궁금했는데 목사님께서 무덤을 만드는 데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데 청동기 시대가 기원전 약 1000년 전 쯤 이라고 한다. 지금은 기원후 2000년인데 그럼 이천에 사람이 살기 시작 한 것이 3000년 전부터!! 우리는 고인돌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두번째로 본 것이 "반룡송"이다. 반룡송(만룡송이라고도 함)은 천연기념물 381호 이다. 이 소나무는 한 그루만 심어진 것인데 뿌리에서 다른 나무가 자라서 여러그루처럼 보인다. 반룡송은 도선비기를 쓴 도선이 신라 말에 심었다. 함흥,서울,계룡산,이천,강원에 심었는데 강원에 있는 반룡송은 죽었다.그런데 신기하게 함흥에서는 이성계가 태어났고, 서울에서는 영조임금,계룡산에서는 정감록이 태어났다. 이 반룡송은 나무의 가지가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이 신기하고 독특해서 사람들이 많이 보러온다. 나도 반룡송처럼 독특하게 살고 싶다.

세번째로는 백송을 보았다. 백송은 천연기념물 253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8그루 있다. 그 중에서도 이천에 있는 것이 가장 예쁘다. 원래는 전라감사(전라도지사)였던 민달룡의 무덤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원산지는 중국이고키우기가 아주 어려운 관상수이다. 그러나 이천에 있는 것은 벌써 220년이나 된다고 한다. 이천 백송은 밑부분에 껍질이 많이 벘겨졌다.그 이유는 백송의 껍질을 먹으면 만병이 났는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목사님께서는 서울 재동의 헌법재판소와 충남 예산에 있는 백송도 보셨다고 한다.나는 이 곳에서 자연,문화유적,믿음 그리고 나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결심을 헸다.

네번째는 이천 향교를 보았다.이 곳은 옛날 학교이다. 엣날에는 초등학교가 서당이었고 중,고등학교가 향교,서울대학이 성균관이다.(지방대학은 서원) 이천향교에는 차별없이 공부했다.그러나 양반은 과거시험을 보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잡과시험을 보았다. 놀라운 점은 선생님은 1명인데, 학생이90명이라는 점이었다. 이런일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이제부터는 나도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야지~ 새벽이 화이팅!!!

다섯번째는 양정여고에 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는 감리고 아펜셀러 선교사님이 1885년에 세운 "베제학당"이다. 배재학당이란 이름은 고종황제가 잘 배워서 큰 재목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그때부터 여러 개의 학교가 세워졌는데,이천에는 1970년에 처음으로 양정여고와 특신학교(이천초교)를 세웠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공부하기 좋은 시설을 만들어주셨다. 그 분들이 너무너무 감사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여섯번째는 서희 장군의 동상을 보았다. 서희장군은 고려 초창기의 충신이다.18살때 과거에 급제를 해서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많이 맡았었다.993년,80만명의 거란족이 처들어왔다. 그 당시의 80만명의 군사이면 지금의 500만명 쯤 되는 아주 많은 군사이다. 거란은 자신이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상각해서 옛날 고구러의 땅을 달라고 성종임금에게 소손녕이란 장군이 말했다. 불안한 왕은 회의를 열었다. 그런에 의견이 항복하자는 말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하지만 곡식은 아까워서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곡식은 대동강에 버리라고 했다. 그 때 서희장군이 반대하고 싸우자고 했다. 성종임금은 그 말을 듣고 싸워서 이겼다.

그후 화가 난 소손녕은 수 많은 군사를 앞세우고 항복하라고 하자 서희장군이 소손녕에게 가 보았다. 소손녕은 아주 높은 의자에 앉아서 밑에서 절을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서희장군은 절도 안하고 만나지도 않았다. 그 배짱을 보고 소손녕은 감탄하고 그냥 만나자고 했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고구려의 땅을 달라고 하자 서희가 우리나라 이름이 고구려와 비슷한 고려이니까 우리가 후손이라고 했다.

소손녕은 인정하고 왜 거란하고 친하지 않고 송나라하고 친하냐고 물어봤다. 그 때 우리나라와 거란 사이에 있던 여진족 때문에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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