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역사기행
•홈  >  사역  >  어린이역사기행

 "

목록보기

  제  목 : 사진 스크랩북 쓰기 자료입니다. 조회수 : 2107
  작성자 : 박행신 작성일 : 2006-08-07

HUMAN/인류

빌레못 동굴

구석기시대의 이 동굴 유적지는 동굴 입구에서 약 900m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데, 당시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은 함몰되어 큰 돌로 막혔으며, 그 입구로 보이는 곳에서 많은 양의 숯이 발견되어 굴속의 생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에서는 긁개, 돌칼, 흠날을 비롯하여 모두 84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상모리-사계리 해안 발자국 유적지

삼양동 선사유적지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사람이 살던 곳으로 중심 시기는 기원전 1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확인된 집 자리만도 236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눈여겨 볼만한 것은 삼양동식 토기인데, 제주 고유의 토기이다.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기원후 100년경 이 마을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불에 탄 흔적도 없이 유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채로 폐허가 된 것이다. 아마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었거나 강력한 용담동 세력에 의해서 밀려났을 가능성이 높다.

공항고인돌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조사된 지석묘는 대부분 남방식이고, 숫자는 200기를 넘지 못하나 원래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제주도 지석묘의 석재가 깨어지기 쉬운 현무암질이고, 지석묘의 위치가 대부분 후에 마을이 들어선 곳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훼손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공항고인돌에는 성혈과 치석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는데, 성혈은 고대인들이 여성의 생식기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흔적이며, 치석의 흔적은 고대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RESISTANCE/저항

항몽유적지_1

항몽유적지_2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공격으로 쫓기던 삼별초의 지도자 김통정의 자결로 대몽항쟁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후 몽고는 제주도를 거점으로 일본을 침공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그래서 몽고는 이곳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직접 관리하였다. 이때부터 이곳의 자연조건에 맞추어 우마 양육의 목장을 적극적으로 운영하였다.

위의 사진은 삼별초의 대몽항쟁으로 목숨으로 잃은 분들을 기리는 순국기념비이며, 아래의 사진은 박정희대통령 시대에 조잡하게 복원된 내성의 일부이다.

항파두리(외성)
길이가 6km이며, 내외 2중으로 만들어 진 항파두리 성은 13세기의 고려 성곽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성은 방어성이 아니라 개경과 같은 도성으로 건설되었는데, 삼별초가 진도에 정부를 세웠을 때도 용장산성을 건설하여 도성으로 삼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웠었다. 당시 이 성안에는 관아와 군사시설이 갖춰져 있었고, 강화와 진도를 거쳐 온 관리들과 그 가족, 그리고 삼별초 병사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호국의 얼을 불태웠던 것이다. 이 성은 13세기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보존되고 있다.

살 맞은 돌

환해장성
제주도의 해안선을 따라 약 120Km에 쌓여진 석성인데, 삼별초군이 진도에 용장산성을 쌓고 대몽항쟁을 전개하자 고려정부는 삼별초군의 제주도 접근을 막고자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 후 삼별초에 의해서 제주도가 함락되자 삼별초군은 제주도에 항쟁의 거점을 마련한 후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제주도 상륙을 차단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환해장성을 완공하였다. 이후 이 성은 조선시대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 보수하면서 왜구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알뜨르 비행장

일오동굴
제주도 해안에서 인공동굴을 보는 것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상일출봉 밑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송악산 바닷가에서는 더욱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결7호 작전(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제주도 방어작전)이 구체화 되면서 일본은 제주도의 해안에 수많은 동굴을 팠다. 해안 동굴 속에 어뢰를 장착한 소형보트를 숨겨두었다가 미군함대가 나타나면 그대로 돌진하여 자폭하였는데 이들을 가이텐(回天) 자살특공대라고 부른다. 송악산에는 15개의 인공동굴이 남아있기 때문에 일오동굴이라고 부른다.

조찬 만세동산


HISTORY/역사

화북포구
화복포구는 조선시대 제주의 2대 포구(화북포구, 조천포구)의 하나로 제주읍성과 가장 가까운 포구였기에 그 중요성은 더 했다. 이곳을 통해서 송시열, 김정희, 최익현 등의 유배객들이 제주에 들어왔다. 화북포구는 김정목사에 의해서 정비되었는데, 그는 포구를 정비하는 일에 손수 돌을 나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피로가 겹쳐 급사하였다. 포구에는 김정목사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화북 비석거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의 어귀에는 어김없이 비석거리가 있었다. 그 마을을 위해서 힘쓴 사람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거리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비석에는 비문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다. 더 정성스레 비석을 세우는 경우에는 비석을 새긴 사람의 이름까지 새겨진다. 그 비문에 대한 책임감이자 자부심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화북 비석거리에 있는 비석의 특징은 비석에 성씨가 뭉개져 있다는 것이다. 비석치기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비석치기는 민중이 보여준 최소한의 분노의 표시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비석의 이름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성씨만 뭉개진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보다 가문을 중요시 여기던 사회적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연북정
조선시대에 제주에 부임한 지방관들에게 있어서 중앙정계에 복귀하는 것은 간절한 꿈이었다. 그러니 목민은 뒷전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런 촌구석을 벗어나 출세의 길을 걷고 싶은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제주에 유배 온 유배객의 심정은 더했다. 지방관들에 비해서 그들은 종신토록 이곳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북쪽이 가지는 의미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므로 처지는 다를지언정 제주에 온 양반들은 누구나 이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살았다. 연북정은 그들에게 희망의 등대였다.

추사적거지_1

추사적거지_2
유배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본향안치는 죄인을 낙향시켜 살게 하는 형벌이다. 중도부처는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일정한 곳에 머물러 살게 하는 형벌이다. 주군안치는 죄인의 활동범위를 비교적 넓게 허용해 준 것으로 유배지의 행정구역 안에서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다산 정약용에게 내려진 형벌이다. 그래서 다산은 유배지를 돌아다니며 민중들의 생활현실을 보았고, 그것이 <목민심서>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위리안치는 생활하는 집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한 형벌이다. 추사에게 내려진 형벌이다. 그런 까닭에 추사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유배형의 차이로 인하여 다산은 사회현실을 보았고, 추사는 자신의 내면을 본 것이다. 절도안치는 섬에 가두어 살게 하는 형벌이다.

대정향교
향교는 관립교육기관으로 지방 수령이 파견되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씩 설치하였다. 대정향교는 태종 때 대정현에 설치하였던 것을 효종 때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350년 전이다. 추사가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 자주 갔던 곳이 대정향교인데, 대학자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향교 나들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향교 동재(기숙사)의 현판으로 써준 <의문당(疑問堂)>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또한 이곳은 세한도의 모델이 된 소나무로도 유명하다.

관덕정

제주목 관아터

오현단
오현단은 조선시대 제주인들을 크게 교화한 인물로 평가 받는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동계 정온, 청음 김상헌, 우암 송시열의 오현을 추앙하여 모셔놓은 사당인데, 숙종 때 귤림서원이라 하여 처음 세운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된 후, 제주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다시 마련한 제단이다. 오현단 내에는 이들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조두석과 함께 성균관 북쪽 벼랑에 새겨진 송시열의 글씨를 탁본하여 다시 새긴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의 마애비가 남아 있다.

하멜 기념비
제주도에 표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 사람들이었는데, 사신들을 통하여 송환되었다. 일본인들도 표착한 예가 많이 있다.

최초로 서양인이 표착한 것은 네델란드인 벨테브레인데, 그는 나중에 조선인으로 귀화하여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후에 하멜일행이 제주에 표착하였을 때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하멜 일행은 조선 효종4년(1653년)에 표착하였는데, 이듬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전라좌수영에서 잡역에 종사하던 중 동료 7명과 함께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1668년에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동인도회사에 그 기간동안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하여 일종의 하멜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이다.


백조일손 학살터와 묘지
1950년 음력 7월 7일 새벽, 일제가 버리고 간 탄약고 터에서 193명의 양민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좌익분자를 사전에 격리,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예비 검속'은 무고한 양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날 새<

 "

전체댓글 0

댓글 쓰기0/200
입력
  이전글 : 김예린 충주역사 기행 참가합니다...
  다음글 : 예인엄마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