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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고적답사를 다녀와서... |
조회수 : 2061 |
작성자 : 이성진 |
작성일 : 2003-08-09 |
나는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고적답사를 7월28일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처음 가는 것 이라서 가기 싫었지만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갔다. 그래서 새벽 1시에 이천에있는 교회에 모여서 2시에 고적답사를 출발하였다.
7월 28일..
4시간30분 동안이나 걸려 송광사에 도착하였다. 송광사를 들어갈 때 구시라는 밥통이 있었다. 구시는 비사리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송광사는 3대보물사찰 중의 하나라고 한다. 송광사 안에 들어가면 관웅전에 고종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석가모니 아래에 고종을 뜻하는 해와 명성황후를 뜻하는 달이 그려져 있다. 그 다음엔 고인돌 공원에 갔다. 중국,네덜란드, 등등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2천 몇 백개 정도 되지만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3만개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몇천개인줄 알았지만.. 3만개였다.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고인돌이 발견되다니...나도 죽어서 무덤이 고인돌처럼 유명했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으로는 낙안읍성에 갔따. 낙안읍성 앞에 해자가 있었다. 해자는 왜군들이 해자를 건너오는 동안에 화살을 날리고, 돌을 던져 못 올라오게 하는 방어시설이다. 나도 해자처럼 나쁜사람을 막아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왜성에 갈 차례였다. 왜성은 일본 사람들이 쌓은 성인데 부산에 있는 모둔 보급물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쌓았고, 이순신 장군이 무서워서 왜성을 쌓았다고 한다. 왜성에서 이순신 장군이 자기의 목숨을 받쳐서라도 우리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셨다. 나도 그런 인물이 될 수는 없을까? 그 다음 상족암에 갔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공룡발자국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퇴적암을 보게 되었는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신것 처럼 나는 이렇게 느껴졌다. 1년2년10년을 1초라도 아끼면서 살아야겠다고.. 또 해식동굴이 있었는데 그것은 퇴적층에서 파도로 인해 구멍이 뚫려 해식동굴이 만들어졌다. 이제 28일의 마지막 스케쥴이었떤 관음포에 갔다. 관음포는 이순신장군의 시신을 처음으로 인치해 놓은 곳이고, 두번째로는 충렬사 그다음으로는 아산충무공으로 옮겨 졌다고 한다.
7월 29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진주성에 가야만 했다. 진주성은 김시민 장군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동상과 좀 떨어진 곳에 의기사가 있었다. 의기사에서는 논개라는 기생이 있었는데,나라를 위해서 10손가락을 꽉 쥐고,(반지가 안 떨어지게..)왜적장군과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 두번째는 한산섬에 갔다. 학익지전법으로 전투에서 승리하여 삼도수군통제영을 제승당으로 삼았다. 쇠고랑전법을 사용해 6척의 배로 200척의 배를 침몰 시켰다,.그다음 이순신장군의 수루에 가서 시조를 읊어 보았따. 이 시조를 지으시면서 이순신 장군을 얼마나 걱정흘 많이 하셨을까?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칸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세번째는 세병관으로 갔다. 세병관에 갈 때 벅수가 있었다. 그것은 돌로 된 장승 이었다. 세병관에 들어갈 때 세병관이라고 크게 쓰여진 현판 글씨가 있었다. 세병관은 앞으로 임진왜란 같은 전쟁 말고 평화로운 세상을 누리기 위해 생겼다고 한다. 네번째는 외도에 갈 차례였다. 외도는 16년간 정성을 다해 만들었따고 하였다. 몰랐던 여러식물도 많았고 특이하게 생긴 나무도 보았다. 나도 외도처럼 잘 가꾸어진 사람이 되고 싶다.
7월 30일..
첫번째는 을숙도에 갔었다. 을숙도는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지 않게 하려고 만든 낙동강 하구뚝도 있었다. 두번째는 자갈치시장에 갔다. 자갈치시장은 6·25일 전쟁때 세워져서 부산으로 피난을 온사람 덕에 유명해졌고, 자갈치시장은 원래 자갈처시장이었는데 발음하기 어려워 자갈치시장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세번째는 태종대에 갔다. 태종대에는 자살바위가 있는데,그 바위에서 자살을 많이 한다고 한다. 네번째는 패총박물관에 갔다. 그 곳에는 토우가 있었다. 곰 같이 생긴 토우도 있었는데 그것을 신으로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그때 사람들은 식량이 풍부한 곳에서만 많이 살았다.. 이제 마지막 날의 마지막 스케쥴인 유엔군 묘에 갔다. 유엔군 묘지는 6·25전쟁때 21개국이 우리나라를 돌보아주어서 외국인들이 약 3,400명 정도 돌아가셔서 뭍어둔 곳이라고 한다. 목사님께서 이해인 수녀의 시를 읊어주셨다. 죽을 때 는 꼭 좋은 마침표를 찍어라! 그래서 나도 이제부터라도 좋은일을 많이 해서 좋은 마침표를 많이많이 찍어야 겠다고 느꼈다. 이와 같이 나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겨울 답사에서 또 갔으면 좋겠다..
3일동안 힘들고, 졸려웠지만 보람이 있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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