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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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역사기행문:....:* 늦게 올립니다... 조회수 : 1686
  작성자 : 백한솔 작성일 : 2005-02-12
목사님[!]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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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day~▨]
첫째날,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로 향하였다.
저번 역사기행과는 달리 새벽에 출발하지 않고 아침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많이 피곤하지 않아서 다른 친구들은 다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잠들지 않았다.
그렇게 잠들지 않은 채로 나는 첫번째 목적지인 행주산성까지 도착했다.
행주산성으로 직접 온 친구들도 있었다.
그 친구들도 우리 일행에 합류하여 첫째날에 역사기행을 시작하였다.

첫번째 도착한 행주산성은 권율 장군이 임진왜란의 삼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싸움이 하루종일 계속되자 화살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러자 성에 있던 여자들이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라서 우리편 군사들은 그 돌을 이용해 적군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덕포진에서는 대포를 보았는데 이 곳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때 대포를 쏘아서 싸움을 벌였던 곳이라고 한다.
덕포진에서는 파수청터도 있었는데 그 곳은 대포를 쏠 때 대포에 불을 붙이기 위해 불을 만들어내던 곳이라고 한다.

손돌의 묘는 고종이 강화도로 건너갈 때 고종의 뱃길을 안내했던 뱃사공이라고 핸다.
손돌은 고종이 강화도로 건너갈 때 물이 휘감기는 곳이 피해가기 위해 돌아가려고 하였다.
고종은 그 모습을 보고 손돌이 자신을 적군들에게 유인하려는 것인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손돌이 그것이 아님을 해명하려 했지만 고종은 끝까지 처형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손돌은 왕인 고종을 위해 바가지를 물 위에 띄워 강화도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고종은 그 자리에서 손돌을 처형하였고 그 바가지를 따라간 고종은 강화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었고 그제서야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것을 기리기 위해 고종은 손돌의 묘를 지었고 그 곳을 손돌목이라고 했다.

교육박물관에서는 옛날 우리 엄마 아빠들이 학교에서 쓰시던 학용품들이나 옛날도구들을 전시해 놓았다. 그리고 어른들이 옛날에
다니던 학교에서 동요도 부르며 옛날에 어른들께서 공부하시던 책들도 전시해놓았다.

초지진과 덕진진에서는 외적들을 막기 위해 진을 쳐놓은 것이라고 한다.

광성보는 초지진과 덕진진과 같이 외세를 방어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초지진과 덕진진 보다는 더욱 방어시설을 강화하고 성문도 건립하여 외세를 방어했던 곳이라고 한다.

갑곶진에서는 갑곶돈대와 강화역사관, 탱자나무 등을 볼 수 있었다.
강화도의 역사들이 담겨있는 강화역사관에서 여러가지를 볼 수 있었다.
또한 탱자나무는 나무의 특성상 뾰족하여 성곽주위에 심어서 외적들이 성주위로 진입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고 한다.

선원사터는 고종이 강화에 와서 지은 절이 있던 곳인데 높은 직분을 가진 승려들이 있던 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팔만대장경판을 만드는 것을 감독하기도 하는 곳이라고 한다.


[second day~▨]
둘째날 아침에는 마니산을 등산했다.
마니산 정상에는 참성단이 있는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마니산 정상까지는 918개의 계단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올라가거나 내려올때 계단 수를 세어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마니산 정상에 올라가보니 조금 추웠다.
그렇지만 힘들게 올라오니 기분이 좋았다.

오상리고인돌과 강화고인돌은 유명한 고인돌이다.
특히 강화고인돌은 아주 커서 족장의 무덤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연무당터는 한일수호조약을 맺은 곳이라고 한다.
한일수호조약 때문에 항구가 개항되었고 신식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

고려궁터는 고종이 머물던 고려궁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몽골의 요구로 성을 스스로 허물었다고 한다.

외규장각은 국가의 중요한 책들을 보관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책들을 도적질해가서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강화산성 북문에서는 멀리에 북한 땅도 희미하게 보였다.

강화성당에서는 서양식 건물이 아닌 한옥건물구조를 볼 수 있었다.
영국신부가 우리나라 정서에 맞도록 우리나라 건물구조를 빌어서 지은 성당이라고 한다.

용흥궁은 철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third day~▨]
삼랑성은 정족산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족산 사고에서는 외규장각 같이 우리나라의 중요한 책들이나 문서를 보관하던 곳인데 임진왜란때 왜구에 의하여 소실되었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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