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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아프간에 억류되어 있는 형제, 자매와 관련하여 |
조회수 : 1923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7-08-25 |
이범성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선교학)
1. 정확한 정보
23인과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정보가 난무하는 가운데, 책임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공식입장을 밝히는 단일 채널(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위원회와 대변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채널은 피랍된 23인이 자원봉사에 나서게 된 취지와 그들에 대해 소개할만한 인적사항 등을 공개하는 한편, 이들을 파송한 샘물교회와 한민족복지재단의 대사회활동을 소개하여 23인과 그 관련기관들에 대한 불필요하고 부정적인 오보나 추측들을 일소하는 목적으로 사용되면 좋을 것입니다. 피랍된 23인(현재 21인)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있는 전국의 모든 기독교회들은 그들이 같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수시로 접하게 되는 외부로부터의 질문과 도전에 확신을 가지고 응답할 수 있도록 23인과 그 관련기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피랍된 형제, 자매 23인에 대한 명칭을 통일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분쟁지역 재건을 위해 샘물교회가 파송한 기독교 자원봉사단 23명’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습니다. 이 명칭은 이들의 정체성을 기독교인으로서 명백히 밝히면서도, 동시에 그 여행목적이 분쟁지역에서 행해진 인류애와 재건을 위한 봉사라는 사실을 확실히 전달해 줍니다.
2. 부정적 여론에 대해
대부분의 서구세계 언론은 피랍된 23인을 ‘사회 재건을 위한 한국인 기독교 봉사단’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억울하게 종교적 구실을 붙인 정치적 목적에 희생되고 있음을 명확히 보도하고 있는 반면에, 오히려 한국의 일부 여론은 23인을 비난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난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서 이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선교가 금지된 지역에 갔다는 것과 가능한 위험에 대한 정부 측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난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가려내는 일 역시 23인을 위해 한국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정부 측에서 경고했으나 출국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들의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고 봅니다.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 시민단체의 역할이 존중되며 권장되는 시대입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시민단체의 한 중요한 형태인 교회나 기독교복지재단 등이 분쟁지역에서 NGO성격의 활동을 전개한 사실이 비난 받을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분쟁지역이기 때문에 봉사자가 필요한 법이고, 정부 측은 발생 가능한 위험을 경고하는 것 또한 당연하며,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봉사에 착수하여 혹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도 정부와 국민들은 그들의 도덕적 가치관을 높게 평가하며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구촌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올바른 태도 일 것입니다.
과거에 한국 역시 분쟁지역이 되어 위험한 시대를 살아왔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해외 봉사자들, 특히 기독교선교사들의 매우 값어치 있지만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도움을 받아온 것이 한국의 그, 현대사입니다. 23인의 위험을 ‘자업자득’이라는 한마디말로 치부하려는 일부 여론의 냉소적 태도는 사해동포정신을 누구보다 잘 체득한 한국민족에게 있어서 낯선 것이 아닐 수 없으며, 분쟁지역의 주민들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바쳐 헌신한 봉사자들의 숭고한 정신까지도 폄하하는 일련의 집단 이기주의적 태도는 우리시대의 상실된 인간성을 반영하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종교를 정치에 이용
23인은 기독교인이거나 선교사였다는 이유로 붙잡힌 것이 아닙니다. 탈레반은 그들이 억류하게 된 23명의 한국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는 채 납치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습니다. 물론 인질로 잡은 이후에 이들이 한국인이며 기독교인이며 봉사를 목적으로 아프간에 입국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23인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혹은 선교를 했기 때문에 억류되게 된 것이 아니라 인질극을 위한 대외명분이 필요했고 이 목적을 위해 종교의 이름이 이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문제들을 종교의 이름으로 해결해 보려는 시도는 비단 탈레반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기독교 국가로 여겨지는 미국정부도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을 대적하기 위해 그들을 비기독교 세력으로 범주화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권 사람들을 총괄하여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의심하는 행정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스러운 것은 중동의 이슬람 지도자 회의가 탈레반의 인질극을 ‘비 이슬람적’이라고 대외에 공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탈레반의 정치적 의도를 그들의 종교로부터 엄격하게 구분하였습니다. 종교적 극단주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지혜가 모든 종교인들에게 필요합니다.
종교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분석과 판단 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타종교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이해가 마찬가지로 필요합니다. 그동안 기독교회는 타종교 연구를 대결 구조 속에서만 이해해왔지 공존과 협력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여겨집니다. 그 결과 이번 피랍 사건의 피해 당사자인 교회가 이슬람에 대한 권위 있는 전문가 한 사람 내세우지 못하고 종교를 구실로 삼은 정치 놀음 속에서 혼란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4. 한국교회의 반성
23인을 아프간에 보내서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한민족복지재단 회장과 샘물교회 담임목사와 예장통합 총회장 등이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들 23인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면 이 사과는 불필요한 것이고 부적절한 것이 될 것입니다. 피해자 가족과 한가지로 이들 대표들은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심려를 끼쳐 유감이라는 표현이 보다 더 적절한 대 국민적 입장 표명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 사과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사과한 자나 사과를 받는 자가 아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혹시 이 사과가 앞으로 타 종교권에서는 기독교선교를 자제하겠다는 뜻으로 전달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들이 어느 시대에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포교를 허락한 곳에서만 전도를 하였습니까?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존중되어야한다고 믿는 것은 민주주의의 신념입니다. 모든 국가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전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듣는 이와 믿는 이가 생길 수 있겠습니까?
사과는 23인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한국기독교에 대한 사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23인에 대한 한국 일부 여론의 비난은 분석해 보면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불건전한 선교를 실행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회에 비친 한국교회의 선교는 많은 경우에 불충분한 준비와 세력 확장을 추구하는 이기적 동기와 교파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요구하는 개종이라는 좁은 틀에서 행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다지 헌신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개인 자신의 삶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는 경우를 보았다든지, 또 선교지에서 돌아 온지 여러 해가 지난 어떤 사람이 선교사라는 직분을 마치 교회의 안수직분처럼 권위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계속해서 사용한다든지 하는 경우들을 경험한 것입니다. 또한 선교여행이라는 이름으로 해외나들이를 한다든지, 선교사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해외거주 등의 개인 유익을 꾀한 경우가 있고,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외국에 나가 방문지 현지인과 마찰을 일으키는 행위 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비상식적인 수준에서 기독교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은 흘려 넘길 수 있다고 해도 상식적인 사람들의 이러한 비난은 귀를 기울여 듣고 반성해야 합니다.
5. 사회성 결여의 문제
이러한 모든 비난의 이유들은 한국 기독교가 사회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한마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선교를 논하기 이전에 한국 기독교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교회가 추구하는 이상과 동떨어진 상반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사회에 노출해 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선교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지난 수 십 년간 한국교회는 사회에 교회와 교파의 분열과 경쟁을 보여주었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경쟁적 이미지로 비쳐졌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사회적 역기능성은 사회에 분쟁과 불안을 조성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근간에도 한국교회는 사학비리 문제로, 목회지 세습 문제로 그리고 목회자 비과세 문제로 한국사회로부터 비사회적 집단이라는 비난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일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차라리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비난 중에 많은 부분을 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약속을 할 수 없는 교회라면 더 이상 사회로부터 그동안 인정 받아오던 존재근거를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선교개념은 세계교회적 틀 안에서 이미 40년대 말에 ‘책임적 사회’ 건설의 문제로 그리고 50년대 말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 회복의 문제로 해석되었습니다. 선교의 목적은 교회로 사람을 모아들이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신자들이 세상으로 나가서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온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선교는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선교의 현장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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