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보기
제 목 : 좋은 설교문 한편 읽어 보세요. |
조회수 : 2437 |
작성자 : 박행신 |
작성일 : 2009-06-01 |
현대성우리조트에서 열린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제7회 국제심포지엄
2009년 5월 27일 수요일 아침경건회 때
대한성서공회 총무이신 민영진박사님께서 하신 설교원고인데
민영진 박사님은
평생을 성서의 비평적연구와 원전번역, 그리고 성서공회를 위해서 헌신하신 어른이십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과 삶, 그리고 목회를 생각했습니다.
번역하면
막 15:34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언행을 듣고 본 이들, 곧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였고 그것을 전파한 이들이 전해 준 내용이 처음에는 히브리어나 아람어였을 터인데 그 구전(口傳)을 기록으로 옮겨 정리하는 과정에서, 비록 그들이 전수 받은 그대로 내용을 얶었을 것입니다마는(눅 1:2), 매체 언어는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바뀝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복음서에서, 히브리어로는 이렇게 이렇게 말하는데 그 뜻은 이러 이러하다라고 하는 번역자의 설명을 읽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일고 있는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구시(九時)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飜譯)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개정 막 15:34)
돌이켜 보면 저의 생애에서 지난 20여 년간은 성경번역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 번역자가 되기 전, 그전 20여 년간은 저는 히브리어성경의 본문비평가였습니다. 성경의 원문비평을 해온 생애도, 성경을 번역해 온 기간과 같이 20연년이 됩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사본들과 고대 번역들을 비교하면서 5천여 곳의 문제 되는 본문들의 최초본문의 형태는 무엇이었을까를 탐구하는 하는 것이 제가 몰두해 온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본문비평가와 번역자는 서로 좋은 이웃이 못 됩니다. 관심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문비평은 원문회복이 원초적 관심입니다. 그것이 뜻이 통하든 안 통하든 괘념(掛念)치 않습니다. 오히려 문맥에 잘 맞지 않고 뜻이 잘 안 통하는 비문(非文) 같은 것이 더 원문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 본문비평학의 정설입니다.
그러나 성경 번역은 그럴 수 없습니다. 번역문을 읽는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말이 본문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런 뜻도 전달하지 못하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해 놓으면, 의미가 없거나 다른 뜻으로 잃기거나 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래서 번역자는 원문의 전체적인 의도를 파악하려하고 한 본문에 대한 여러 해석 전통들을 참고하면서 가능한 한 뜻이 통하는 번역을 하려고 합니다. 제한 된 범위 안에서 본문 재구성과 추측도 허용됩니다.
어쨌든 저는 평생을 이문(異文)을 보이는 수많은 사본과 서로 다른 이해를 반영하는 수많은 고대역 현대역들을 비교하고 분석하고 따지는 일만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저는 한 시인이 남긴 한 조각의 시를 발견했습니다.
땅 위에
- 김춘수
구름 위 땅 위에
하나님의 말씀
이제는 피도 낯설고 모래가 되어
한 줌 한 줌 무너지고 있다.
이 시인은 말씀이신 예수, 하나님이신 예수, 그분이, 평소에 하신 말씀 때문에 유대교당국과 로마의 통치자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데, 목숨을 내놓고 하신 말씀이어서 그 말씀 때문에 처형을 당하셨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는 피가 묻어있는데, 피 묻은 말씀이 나를 깨우치고 하나님을 알게 했는데,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알고 있는 말씀에는 갈보리의 피도 낯설고, 오히려 그 말씀은 모래가 되어 한줌 한줌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감상하면서 저는 평생을 파피루스 사본과 양피지 두루마리 사본만을 뒤져온 제 삶에서 이 영원하신 말씀이 “이제는 피도 낯설고 모래가 되어/ 한줌 한줌 무너지고 있다”는 제 현실을 발견했습니다. 저에게 말씀은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쓰인 글이었을 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번역의 대상이었을 뿐 순종을 요구받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 딱한 난국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갈보리의 십자가 피가 묻어있는 우리 주님의 육성을 들을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인은 다음 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남천(南天)이 젖고 있다.
남천은 머지 않아 하얀 꽃을 달고
하나님의 말씀 머나먼 말씀
살을 우비리라
다시 또 우비리라.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비가 내리고, 메말랐던 남천(南天)에 물기가 돌더니 하늘이 하얀 꽃을 피웁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 내게 멀기만 했던 그 말씀이 내게로 다가와서 십자가의 대못이 예수의 살을 우볐듯이, 창이 우리 주님의 옆구리를 찔렀듯이 그 말씀이 나를 못처럼 찌르고 창처럼 내 살을 우비고 있다고 합니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같은 시인이 십자가 처형 때 사용된 대못을 상기하면서 “못”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못
- 김춘수
술에 마약을 풀어
어둠으로 흘리지 마라.
아픔을 눈감기지 말고
피를 잠재우지 마라.
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
너희가 낸 길을 너희가 가라.
맨발로 가라.
숨 끊이는 내 숨소리
너희가 들었으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마 사박다니
시편의 남은 귀절은 너희가 잇고,
술에 마약을 풀어
아픔을 어둠으로 흘리지 마라.
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
너희가 낸 길을 너희가 가라.
맨발로 가라. 찔리며 가라.
저는 고난주간 설교를 하거나 사순절 개인적 명상을 하면서도 그 끔찍한 십자가의 고통을 쉽게 관념화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죄수들이 고통을 잊기 위해 마취제를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신학화시키고 관념화시켜 버리는 것은 마치 마취제를 마시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저에게 십자가는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관념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아무런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시적 화자의 입을 빌어, 내가 시편 22편 1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읊었으니 나머지 구절은 너희가 이어보라고 합니다. 1절은 우리 주님께서 2절은 내가, 3절은 다시 주님께서 4절은 내가, 5절은 주님께서 6절은 내가 읊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슴을 거두시면 나머지는 21절까지는 내가 다 이어서 읊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 생애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飜譯)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여기 “번역하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역사적 금요일 오후에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시편 22:1-21을 교독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름 위 땅 위에/ 하나님의 말씀/ 이제는 피도 낯설고 모래가 되어/ 한줌 한줌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소개한 두 편의 시를 쓴 시인 김춘수는 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옆에서 어깨너머로 성경을 훔쳐보면서 예수를 만났던 인물입니다. 저는 그의 시를 감상하면서 주님께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고, 목사요, 신학자요, 설교자요 성경번역인 너에게서는 내가 일찍이 김춘수 시인과 같은 이런 믿음을 못 보았다”
동역자 여러분, 우리의 설교에서 “구름 위 땅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피도 낯설고 모래가 되어/ 한 줌 한 줌 무너지고”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못다 읊으신 시편은 우리가 함께 잇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앞에서 비기독교인들의 믿음 가리키시면서 너희 목사들에게서는 이런 믿음을 못 보았다고 하시는 질책이 우리를 각성시켰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