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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세계 최다 광고상을 수상한 사람, 이재석 조회수 : 2573
  작성자 : 박행신 작성일 : 2009-11-08


자녀들과 함께 읽어보면 유익할 것 같아서
퍼다 올린 글입니다.


낡은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나온다. 연통(煙筒) 밑을 따라가 보니 권총이다. 쏘아 올리기 직전의 북한 미사일 발사대가 보인다. 무시무시한 로켓 대신 옥수수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인공기(人共旗)가 새겨진 옥수수다.사진 한 장이 주는 반전(反戰) 메시지가 수만 시위대보다 강하다. 수백 편 논문보다 더 환경오염이 우리 생명을 위협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독재자에게 식량에나 신경쓰라고 준엄하게 꾸짖는 게 다름아닌 옥수수다.

세계인의 가슴을 강타한 아이디어가 이제석(李濟錫·27)의 머리에서 나왔다. 2007년에만 세계적인 광고상(廣告賞) 29개를 휩쓸었다. 지금까지 받은 상이 50개 가깝다. 미국 SVA(School of Visual Art) 재학생 중 최고였다고 한다.

남들 같으면 애지중지했을 상장, 상패, 트로피를 그는 냉장고에 처박아 놓았다. 개중 몇 개는 버렸다고 한다. 한국 최고의 기업에서 온 스카우트 제의를 냉큼 받았다면 지금쯤 번듯한 사무실에서 편히 살고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이 젊은이는 아메바형(型) "이제석 광고연구소"를 차렸다. 프로젝트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다. 많으면 수백명의 광고맨이 그의 신호에 따른다. 그는 한 자루 칼로 도산검림(刀山劍林)의 세계를 헤치는 협객 같다.


굴뚝 밑에 권총을 그려넣어 대기 오염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광고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말썽으로, 고교시절을 술로 보냈다. 지방대를 나와 주머니에 달랑 500달러를 넣고 미국으로 유학 간 그다. 야생마 같은 한국 젊은이의 세계를 향한 도전, 그 궤적을 추적해본다.

■학원 선생의 한마디

이제석에게는 의대생(醫大生) 형이 있다. 부모 관심이 공부 잘하는 형에게로 쏠렸다. 대구 협성중·고교에 다니면서부터 반항이 시작됐다. 수업시간에는 만화를 그리기 일쑤였다. 몇대 얻어맞은 뒤 찾아오는 갈증을 술로 달랬다.

제3미술학원에서 학원강사 정영규를 못만났다면…. 건달이 됐을 것이다. 그는 고1 이제석에게 "꿈"을 심었다. 그림 재주가 좋다 네 성적으론 4년제 대학 못 가지만 그림으론 갈 수 있다 대학 가면 예쁜 여학생 천지다….목표는 사람을 바꾼다. 400점 만점에 100점대이던 모의고사 점수가 막판에 300점을 훌쩍 넘겼다.

계명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하니 태도도 바뀌었다. 그토록 싫어하던 공부를 그렇게 간절하게 하고 싶어진 것이다.고교시절에 미술시간만 기다렸어요. 대학 가니 모든 수업이 미술이잖아요. 얼마나 좋았는 줄 아세요. 학교 가는 걸 처음 기다려봤습니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열정(熱情)과 남에게 인정받는 것은 달랐다.


이라크전에서 누군가를 향해 소총을 겨눈 군인. 이 포스터를 둥근 원통 모양의 기둥에 붙이면 총구가 자기 뒤통수를 겨냥하는 것처럼 보인다.

국내 각종 광고상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굴지의 광고사에 응모하러 갔다가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나중에 이제석이 유명해지자 그 회사는 리무진까지 보내며 아양을 떨었다고 한다.

이제석은 국내 응모전에서 쓴잔을 들이켠 결과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1등상을 봐도 그저 그렇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심사위원들이 뭘 원하는지 감(感)이 잡히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졸업 후 광고대행사에 응시했다. 원서는 많이 냈는데 오라는 곳이 없었다. 진짜 사람을 안 뽑는건지, 아니면 서울대, 홍대 같은 간판에 밀렸는지 알 수 없었다. "광고쟁이"를 왜 토익 성적으로 걸러내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동네에서 간판을 그리기 시작했다. 안경점, 사진관, 국밥집 간판이 5.0만점에 4.47이라는 평점으로 수석(首席)졸업한 그의 실력을 보일 유일한 공간이었다. 짬뽕 한 그릇이 수고비를 대신할 때도 많았다.

대구에서 꽤 유명한 국일갈비집 간판을 그릴 때였다. 기획안까지 준비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한참 침 튀기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한마디 했다. 그게 무슨 30만원짜리야, 내게 10만원만 주면 더 좋은 거 해주겠네.돌아보니 동네 명함집 아저씨였다. 간판 그린다고 학교 선후배들에게 핀잔을 듣던 그였다. 아저씨의 한마디가 딱 초상집에 염장지른다는 말 그대로였다. 집으로 와 곰곰이 생각했다. 내 기획안이 남에겐 그리 보였구나!

이제석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남들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것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1년 뒤 미국 뉴욕 맨해튼의 SVA 3학년으로 편입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좌충우돌

영어실력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좌충우돌인터뷰를 위해 전화를 걸자 의외의 말이 나왔다. 조선일보와 사업 한번 해야죠. 이제석은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 같았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부닥쳐보는 것이다. 생긴 건 곱상한 데 전형적인 돈키호테형이다.

그는 대구에서 천방지축이었다. 미국 뉴욕에서도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뜨지 못하면 죽는다!" 이런 사람이 제일 무섭다. 별의별 장애물이 나타나도 그런 인간의 기는 절대 죽지 않는다.

―어떻게 영어를 배웠습니까?

당시 대구에는 변변한 영어학원이 없었어요. 집 주변에 "캠프 워커"가 있었습니다. 아는 분에게 사정해 미술강의를 하겠다고 해 승낙받았습니다. 무료였죠. 미군과 그 가족을 상대로 한 것인데 줄리아나라는 40대 백인(白人) 부인을 만난 게 행운이었습니다. 스캔들이 났다고 할 정도로 줄리아나와 붙어다녔습니다.―무슨 짓을 했길래 "바람났다"는 소리까지 들었습니까.수업시간뿐 아니라 전시회도 같이 다니고 드라이브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프리 토킹하다 보니 영어실력이 확 늘었어요. ("혹시"하고 째려보니 잽싸게) 오해는 마십시오, 줄리아나는 제 스타일이 아니었거든요.

―미국에 가니 뭐가 다르던가요?

우리가 그동안 신문, 방송을 통해 접한 세계는 미국, 중국, 일본 정도였잖아요. 세계 광고계의 스타들은 브라질, 싱가포르, 인도 출신들입니다. 세계가 참 넓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 수업시간에 안셀모라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 강사로 들어왔어요. 말로만 듣던 그는 당시 최고 스타였습니다. 그처럼 되겠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미국은 한국 광고계처럼 텃세가 심하지 않던가요?

그쪽도 텃세가 심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단 교수들이 남학생을 싫어합니다. 과제를 해가도 성의있게 봐주지 않았고요. 사람이 제일 슬플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투명인간 취급당할 땝니다. 남들은 한 작품 해올 때 밤새 만든 작품을 20개나 내보여도 휙 쳐다보고 "넥스트(Next)" 그럽니다.

―또 좌절했습니까?

저는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교수들이 아니면 밖에서라도 인정받겠다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때부터 공모전(公募展)에 응시했어요. 공모전 심사위원들은 세계 최고들이거든요. 제가 어리지만 몇 가지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싸움이 불리하면 룰을 바꾸라" "권투로 안되면 발로 까라"는 거지요. 한국의 학교 판이 더러워 미국으로 간 겁니다. 미국의 학교 판도 더러우니 학교 밖으로 나간 겁니다.


입에 일장기 모양의 복면을 한 도둑이 담을 넘고 있다. 이 포스터 어디에도 독도, 한국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일본의 도둑놈 심보를 즉각 느낄 수 있다.

―첫 상(賞)이 금상 2개씩이었지요?

미국광고협회 공모전이었는데 수상식장에 갈 때 꾀를 냈습니다. 학교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등에는 제 웹사이트를 새겼지요. 걸어다니는 광고판이 되려 한 거죠. 사회자가 소감을 묻기에 "인턴 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폭소가 터졌지만 목표는 이뤘어요. BB DO에서 인턴 자리를 얻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SM엔터테인먼트나 JYP 같은 급(級)의 회사입니다.

―그렇게까지 자기를 세일즈해야 합니까?

저를 알리는 전단지와 함께 앞에 사람 얼굴이 새겨진 지포라이터를 선물로 돌린 적도 있어요. 라이터를 열면 머리에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모양이 나오도록 했지요. 아이디어가 타오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뒤부터 상복(賞福)이 터졌습니까?

미국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공모전에서도 상을 탔습니다. 학생들에게는 그리 상금을 많이 주지 않습니다. 우리 돈으로 300만~400만원쯤 되지요.

―공모전에서 잇따라 상까지 받았으니 미국이 천국처럼 보이던가요?

세 든 집 주인이 알고 보니 현대판 거지였어요. 다이어리를 보면 스케줄이 빽빽해요. 아침은 어디서 공짜로 먹고 점심, 저녁은 어디서…. 별의별 정보가 다 있었습니다. 처음 몇달 동안 핫도그 2개로 하루를 때웠는데 영양실조로 머리가 수북이 빠졌어요. 그래서 그를 따라 무료급식소에 다녔어요. 처음엔 멋모르고 따라다녔는데 한 자원봉사자가 "넌 정상적인 인간인 것 같은데 여기 왜 왔느냐"고 하더군요. 얼굴이 화끈해졌습니다. 알고 보니 스티브 잡스도 그곳에 다녔다더군요.

―SVA도 반액(半額)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면서요?

그 집이 희한하게도 아버지는 흑인, 아들은 백인인데 부자(父子)가 서로 우유를 빼앗아먹고 매일 싸워요. 방 세칸집이었는데 양쪽 방에 부자가 동시에 다른 여자들을 데려옵니다. 밤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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