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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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중국역사기행 조회수 : 2101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6-07-31

중국을 향하여

‘햇살이 파도처럼 부서지는 이아침~
♬두눈비비고 큰기지개~’>

너무나 산뜻하면서도 익숙한 멜로디가 내 귓가를 적신다. 그리고 3초뒤 난 깨닫게 된다. >‘오늘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한 달 전 나는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읽으며 그녀의 여행에 동행했었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나 또한 중국에 대한 아쉬움을 가졌었다.. 그녀의 사소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으며 중국인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생겼을지 하는 궁금증을 갖곤했다.

그리고 오늘 난 드디어 넓고 넓은 중국의 땅을 향하여 출발하고 있다.

<세현이의 기행문 중에서>



비행기 안에서

공항에서 우리는 환전도 하고, 먹을 것도 사먹고, 중국에서 먹을 라면 등을 샀다. 그리고 목사님과 함께 출국 심사를 무사히 마친 후, 비행기에 탔다.

비행기 안에서는 내가 창가에 앉아서 밖을 볼 수 있었다. 밖을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창가에 앉은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만, 내 자리는 안타깝게도 비행기 날개가 보이는 자리라서 그다지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튜어디스 누나들의 서비스는 만점이었다.
잠도 자고,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항주에 도착했다.

<민경이의 기행문 중에서>



육화탑

전단강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우뚝 있으며, 오대10국 때 오월(吳越)의 왕, 전홍숙이 범람을 일으키는 전단강을 다스리려고 전단강 북쪽 연안의 월륜산에 세운 탑이다. 이 탑의 이름인 <육화>의 의미는 하늘, 땅, 그리고 동서남북의 화합을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건축계의 거장인 유호가 목경삼수를 근거로 하여 설계하여 외관은 13층이며, 내부는 7층으로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59.89m이며, 중국 목조 건축 분야의 걸작으로 평가되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국보급 문화재라는 의미이다.



육화비정

10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육화탑은 탑이 손상될것을 우려해 단체 관광객은 올라가지도 못하게 하고 있으며, 청나라때 이곳을 방문한 황제가 비석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를 ‘육화비’라 하고 그곳을 육화비정 이라 한다.



육화탑의 전설

전단강은 매년 음력 8월 18일을 전후해 바닷물의 역류가 이루어지는데, 이 해일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옛날 전단강에는 성깔있는 용왕이 살았는데 육화라는 꼬마아이의 엄마를 데려가 버리고, 아빠는 엄마를 찾다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육화는 이런 용왕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매일 바다에 돌멩이를 던지는데, 이 돌멩이가 용왕이 사는 성문에 떨어져 두려움을 느낀 용왕이 육화엄마를 돌려주는 대신 일년에 한 번 화를 내겠다는 협의를 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단강에 일년에 한번 홍수가 나는 것이라는 고대인들의 해석이 재미있다. 이 육화탑은 약59m로 탑에 달린 풍경의 수가 108개나 되는데, 불교의 108번뇌를 상징한다.



육화탑공원에는 어머니를 잡아간 용왕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무서운 표정을 한 육화와 용왕에게 활을 쏜 장군, ‘으악’하는 소리를 듣기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의 동상이 재미있다.



송성민속촌

항주에는 송나라 때의 거리 모습을 재현한 송성민속촌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남송시대의 항주거리를 재현한 민속촌이다. 관광객을 유치하기위해서 만들어 놓은 민속촌인데,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제법 볼거리가 많이 있어서, 중국의 옛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각종 먹 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상점, 놀이기구, 그리고 전통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 극장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남송시대의 군사복장을 한 사람이 민속촌 입구에서 표를 받고 있다.



송성가무쇼

송성 민속촌의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송성쇼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모두 다섯 가지의 주제로 진행되는 송성쇼는 항주의 역사와 특산물, 그리고 항주의 세계화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극장이나 쇼의 규모가 놀라울 정도로 크다. 특히 레이저를 이용한 무대장치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송성가무쇼의 마지막 주제인 <세계는 하나>에는 일본, 대만 등과 더물에 대한민국의 전통춤인 장구춤이 등장하는데, 썩 잘하지는 못했다. 이곳을 많이 찾는 우리나라 관광객을 겨냥하여 개발한 상품이듯 싶었다.



영은사

 

영은사는 1600여년 전 동진(東晉) 시대에 인도 승려 혜리가 항주에 왔다가 이곳 산의 기세가 매우 아름다워 “신선의 영이 이곳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 후 사찰을 짓고 이름을 영은사라고 하였다. 최근에는 불공을 드리기 위해 몰려든 중국인들로 늘 붐빈다. 대웅보전은 높이 33.6미터의 중국 유명한 건축물중 하나다. 보전 안에는 24.8미터의 여래불상이 있는데, 1956년에 절강미술대학 교수와 예술인들이 합작해 만든 걸작이다. 대전 양 옆에는 20존자천불상이 있고, 대전 앞에는 송대에 건축된 8각 9층 석탑이 있다.



영은사의 아침 분위기가 고즈넉했다.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나무와 건물, 석불상 등은 영은사가 오래된 절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영은사 내에 조그마한 계곡이 있어 비가 올 때면 사원 전체가 안개에 쌓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계곡 옆의 바위에는 촘촘히 새겨져 있는 불상 조각들을 보며 산책을 하는 것도 재미있다.



영은사의 고대석굴
 

항주 서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비래봉이 옆에 있다. 비래봉에는 10-14세기 경에 만들어진 석굴조각품들이 330여 개가 산을 따라 조각되어 있는데 이 석굴조각들은 강남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고대석굴예술을 보여주고 있어 그 가치가 더 빛난다.



항주의 서호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유명한 미인 서시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호'라고도 불린다.

서시에 대해서는 실제 인물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로는 월나라 왕인 구천이 오나라의 왕 부차에게 바쳤던 인물로, 결국은 구천의 계략대로 오나라 왕 부차가 서시의 미모에 빠져 나라 일을 돌보지 않게 되었고, 오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상 양귀비 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미인으로 꼽힌다.



서호 유람선

유람선을 탄 후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뜨거운 햇볕이었다. 유람선 안에는 의자를 놓고 에어컨을 틀어놨는데, 벌써 다른 관광객들이 다 차지하고 있어서 뜨거운 햇빛을 그대로 받으면서 유람선을 타야했다. 그렇게 몇분을 가다가 유람선의 반대편으로 갔을 때, 시원한 강바람이 느껴졌다. 그리고 서호의 풍경이 눈에 환하게 들어왔다. 유람선 갑판에 그냥 주저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유람선 안에 있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다.

서호의 아름다운 섬

서호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호수에는 소영주, 호심정, 완공돈 등 3개의 섬이 떠있다. 호수의 총 면적은 60.8㎢이며, 그 중 수역의 면적은 5.66㎢이다. 서호는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서호 안과 근처에 위치한 유명한 명소 10가지를 서호 10경이라 부른다.



물의 도시, 소주

"上有天堂, 下有蘇杭"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항주와 함께 중국에서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양자강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유명한 물의 도시이다. 기온은 온난습윤하며, 토질이 좋아 자원이 풍부하고, 교통 또한 매우 발달되어 있다.



아름다운 도시, 소주

소주는 중국 역사문화도시 중 하나로서, 기원전 514년에 도시가 성립되었으며, 현재까지 2,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서한 초기에는 동남부의 최대의 도시로 번영하여 "사주지부(絲綢之府 : 비단의 도시)" "어미지향(魚米之鄕 : 쌀과 물고기가 풍부한 곳)" "원림지도(園林之都 : 정원의 도시)" 등으로 칭해졌다.



졸정원

“천하의 원림은 강남에 있고, 그중 소주의 정원이 가장 으뜸이다”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송대부터 이어진 정원은 200가구에 이르렀고, 지금은 10군데 정도가 복원되어 외부에 개방되고 있다. 그 중 송대의 창랑정, 원대의 사자림, 명대의 졸정원과 유원이 가장 대표적인 강남의 원림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명, 청대에 이르러서도 지리적 장점과 견직물 산업을 활성화시켜 부유한 상업 도시로서 그 명목을 계속 유지해 왔다.



졸정원은 소주 동북쪽에 위치해 있고, 명대의 정덕 4년(1509년)에 지어졌다. 졸정원이라는 명칭은 '졸자(拙者)가 정치를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유원, 이화원, 승덕이궁과 함께 중국 4대 정원에 꼽힐 정도로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곳이다. 그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홍루몽 대관원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졸정원은 명나라의 왕헌신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데, 화원은 동, 중, 서 세 부분으로 나뉘며, 명대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창살 무늬가 모두 다를 정도로 섬세하며, 건물은 용의 형상을 띠게 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반영하였다. 총 면적은 5만㎡이며, 그 중 3/5정도는 연못이 차지한다. 연못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자나 복도, 산을 본떠 돌로 만든 석가산이 만들어져 있는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이색적인 건물인 견산루, 파산랑과 경치를 보기위해 지어진 원향당 등이다.



아름다운 졸정원을 산택하고 있는 중국 역사기행팀



강촌교

한산사 앞에있는 아치형의 아름다운 다리이다.한산사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머물렀던 절인데, 그 앞에도 운하가 흐르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 운하를 통해서 수 많은 배가 드나들었을 것이다.



풍교야박이라는 시로 유명한 한산사의 종루

한산사는 당나라의 시인 장계의 <楓橋夜泊>이라는 시로도 유명하다. 장계는 노를 저어 마을로 돌아가던 중 밤중에 풍교에 배를 정박해 두고 있는데 그 때 마침 한산사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月落烏啼霜滿天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하늘 가득 서리가 내리네
江楓漁火對愁眠
풍교에는 고깃배 등불을 마주하여
시름 속에 자고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 밖 한산사에는
夜半鐘聲到客船
한밤중에 종소리가 객선에 이르네

한산사는 장계의 <풍교야박>이라는 시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청나라 건륭도 '풍교야박'에 나오는 한산사를 찾아왔고. 우리나라 판소리 심청가에도 한산사가 나오고, 이웃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이 시가 나온다. 그러고 보면 <풍교야박>은 한산사의 홍보대사인 셈이다.



한산사 대웅전

한산사는 남조 때 지어진 절이다. 원래 명칭은 묘보명탑원(妙普明塔院)이었으나 당대 고승인 한산자(寒山子)가 이 곳에서 머문 후에 그의 이름을 따 한산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대웅전은 높이가 12.5m이며, 뒤편에는 유명한 종이 있는데, 높이가 2m이고 직경이 1.4m이다. 당대의 청동 유두종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인이 광서 32년에 바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일부 파괴되어 신해혁명이 일어난 해인 1911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호구산

북서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원래 이름은 해용산이었는데, 호랑이가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여진 산이다. 산이라고 하지만 그 높이가 37.5m밖에 되지 않아서 언덕이라고 해도 될만큼 나지막한 산이다.

춘추시대 오나라 왕인 합려가 이곳 연못 아래에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한 이 산은 와신상담, 오월동주,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 지성이면 감천 등의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감감천(지성이면 감천의 유래가 된 우물)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는 샘(감감천)이다. 한 동자승이 물을 공양하기 위해서 땅을 파는데, 한 노승이 지나다가 ‘그곳은 물이 나오는 곳이 아니다 만일 물이 나오면 내가 두꺼비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땅에서 물이 솟구치고 노승은 두꺼비가 되었다고 한다.



시검석(試劍石)

이 바위는 오나라의 합려왕이 천하의 명검을 검사하던 바위인데, 돌이 단단하여 검으로 돌을 치면 검이 부러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감장 부부가 만든 검으로 바위를 치자 바위가 둘로 갈라졌다고 한다.



검지(劍池)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합려의 무덤을 만들 때 관 속에 검 3000개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이 검들 중에는 훗날 명검으로 전해지는 검들이 포함되어 있다.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이 검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도굴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왔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도굴은 중단되었다. 지금은 이 곳에 물이 들어차서 연못이 되었고, 사람들은 검지(劍池)라고 부른다.



호구탑

언덕(호구산) 정상에는 호구탑이 있는데, 높이가 47.5m이며 수나라 때 지어진 것이다. 소주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건축물로 몇 차례의 보수공사에도 불구하고 북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호구탑 밑에 합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어 무덤이 탑을 지탱하기 힘들어 지반 침하가 일어나면서 탑이 기울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수공사로 인해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 단 호구탑 내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호구산과 호구탑

송대 시인인 소동파는 "到蘇州而不遊虎邱, 乃是憾事" (소주에 와서 호구를 구경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라는 말을 했을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호구산은 입구와 출구가 다른데, 출구쪽에서 보는 호구탑은 기울어져 보이지 않지만 입구쪽에서 올라가면서 보는 호구탑은 상당히 많이 기울어져 있다.



소주의 비단옷 패션쇼

어릴 때 중얼거리던 ‘비단 장수 왕서방’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만큼 중국의 비단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유명하다. 소주의 비단과 자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특산물로서 쇼핑센터에는 실크로 만들어진 스카프, 넥타이, 잠옷, 블라우스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소주의 비단공장

누에고치로 비단 이불이나 비단 옷을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누에고치를 물에 불려서, 번데기와 누에똥을 꺼낸 다음, 찢어지지 않게 모양을 만들고, 다시 말려서, 여러 사람이 넓게 편다.

얇은 막을 여러 겹 겹쳐서 누에고치를 펼치면 비단 이불이 되고, 실을 골라서 옷감을 짜면 비단 옷이 된다.



상해의 야경(푸동지구)

중국에 관한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도시이다. 상해의 고층빌딩들은 다양한 디자인의 건축물을 장려하는 시정책에 의해 기발한 디자인으로 상해 스카이라인을 장식하고 있으며 과거 조계지로서의 흔적이 남아있는 외탄과 황푸강 바로 건너편 들쑥날쑥 솟은 현대적 고층빌딩은 상해의 과거와 현재를 강 하나사이로 이어주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밤이 되면 동방명주탑을 비롯한 푸동지구의 빌딩들이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하고, 빌딩들의 불빛이 외탄을 더욱 밝게 한다. 상해의 많은 연인들은 이곳에서 야간 데이트를 즐긴다.



상해의 외탄
 

상해는 1842년 남경조약으로 개항된 이후 국내외의 새로운 문물을 흡수해 온 국제적인 상업도시이다. 영국에 의해 중국 최초로 개방될 당시 서양에 개방된 첫 항구도시이며, 오랜 기간의 외국 조계지로 화려한 모습을 갖춰온 상해는 1945년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로 재탄생한 이후부터 등소평에 의한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중국의 여느 도시와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개방이후 90년대 중앙정부가 이곳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시작하면서 동양의 또 다른 홍콩을 꿈꾸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세계적인 경제중심 도시가 되었다.

사진의 외탄은 상해의 상징이자 상해 현대 역사의 축도이다. 전체 길이가 약 1.7㎞이며, 다양한 국가의 건축 양식이 모여 있어서 '세계 건축 박물관'이라고 불리며, 한쪽으로는 넓은 제방을 따라 많은 관광객들이 황포강의 경관을 즐기기 위해 항상 붐비는 곳이다.



남경로

중국은 지저분하고 촌스럽다'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해의 최대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남경로를 거쳐 외탄과 황포강 너머의 푸동지역을 보게 되면 '중국은 최고로 멋지고 화려한 나라다'라는 또 다른 편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남경로는 중국 최대의 번화 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각양각색의 상점과 레스토랑, 백화점, 호텔 등이 위치하여 주말이면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 이곳은 차가 다닐 수 없는 거리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대신 그 사이로 미니열차가 수시로 관광객과 쇼핑객들을 태우고 다닌다.



홍구공원

한국인에게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으로, '윤봉길 의거현장'이라고 새겨진 비석만이 홀로 서 있어서 단지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관광지로 개발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대한민국의 국력을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정(윤봉길기념관)

홍구공원(노신공원)에 최근에 윤의사의 항거를 기념하는 기념탑과 매정(梅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세워져 윤의사의 행적을 전시하는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노신공원(홍구공원)

홍구공원에 노신의 묘와 기념관을 지으면서 노신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기념관은 노신의 고향인 소흥성의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졌으며, 기념관 안에는 작가의 필체가 담긴 원고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덤에는 모택동이 직접 쓴 '魯迅先生之墓(노신선생의 묘)'라는 글자가 있다. 이곳은 상해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오전시간과 저녁 시간에는 휴식과 운동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상해임시정부

오늘날 우리가 임시정부청사로 알고 찾아가는 곳은 마당로(馬當路)에 있는 3층 벽돌집으로, 1926년부터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직후까지 청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매우 낡고, 도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만큼 초라하지만, 하루종일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상해시에서 관리하는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1층에서 짧게 비디오 시청을 하고 나면, 2층과 3층의 전시관을 관람하게 된다. 전시관 내에는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자료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 또한 좋은 공부가 된다. 건물 내에 작은 상점을 운영하여 청사 유지비를 마련하고 있는데, 우표, 악세사리, 장식품 등의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상해에 거점을 확보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가 1932년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현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는 즉사하고, 노무라, 우에다 등에게 중상을 입힌 거사는 유명하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을 비롯한 요인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사진은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태극기이다.



1937년 7월에 터진 중일전쟁으로 상해를 떠나 중국의 각지를 옮겨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았다.

상해 1919.4 ~ 1932.5
항주 1932.5 ~ 1935.11
진강 1935.11~ 1937.11
장사 1937.11~ 1938.7
광주 1938.7 ~ 1938.9
유주 1938.11~ 1939.4
기강 1939.4 ~ 1940.10
중경 1940.10~ 1945.8

사진은 상해 임시정부 청사의 집무실이다.



옥불사

옥불사는 청나라 광서황제 때(1882년)에 지어진 절이다. 당시 절강성 보타산의 승려 혜근이 미얀마에 다녀오다 상해에 들러 기부금을 모아 강만진에 절을 짓고 미얀마에서 가져온 다섯 개의 옥불 중 백옥으로 조각된 석가모니 좌상과 와상을 한 개씩 이 절에 모셔 놓아 옥불사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신해혁명 때 화재로 훼손되었던 것을 1918년 안원로에 송대 건축 양식을 이용한 역동적이면서 웅장한 모습의 절을 중건하였다.



상해 박물관

상해시 중심인 인민광장 남쪽 편에 자리 잡고 있는 상해박물관은 1952년 당시 상해 시장이었던 진의(陳毅)의 지지아래 몇 개의 박물관을 통합하여 세워지게 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하남남로 16호 중환은행건물 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1995년 말 상해박물관 신관이 정식으로 개관하면서 상해박물관은 북경, 남경, 서안의 박물관과 함께 중국 4대박물관 중 하나가 되었다.



상해 박물관은 중국 4대박물관에 걸맞게 과학적인 설비가 갖추어져 있어 선진 소방시설과 디지털 교육설비, 자료실의 첨단관리 시스템 그리고 건물 전체의 자동화 관리시스템이 국내외 관람객들에게 편안한 관람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박물관의 입구에서 중국기행팀이 단체사진을 찍었다.



상해박물관의 진열면적은 12,000평방미터로 1층에는 중국고대 청동관과 중국고대 조소관이 있으며, 2층에는 중국고대 도자관, 3층에는 중국 역대 서예관과 회화관, 새인(옥새, 도장)관이 있다. 마지막으로 4층에는 중국고대 옥기(玉器)관과 중국역대 화폐관, 중국명청대 가구관, 소수민족 공예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중국 고대사를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유물들을 둘러 볼 수 있다. 사진은 박물관에 전시된 청동기 시대의 아름다운 유물이다.



상해에서 점심식사

중국의 요리는 전국적으로 여러 계통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4대 요리이다. 광둥성을 중심으로 남쪽지방에서 발달한 광둥요리와 쓰촨(사천)성을 중심으로 산악지대의 풍토에 영향을 받은 사천요리, 황허 하류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상하이로 대표되는 상해요리, 수도인 베이징의 고도를 중심으로 궁정요리가 발달한 북경요리 등이다. 그 밖에 지방마다 특색 있는 요리가 있어 그 종류만 하더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중국음식이다.



상해의 푸동공항

이번 중국기행은 자주 비행기를 타야만 했고, 바쁜 일정에다가 먼 거리를 이동해야 만 했기 때문에 우리 <중국기행팀>은 철저한 시간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1분이라도 빨리 공항으로 이동하여, 비행기를 탈 때마다 Delay되는 중국항공사에 불평할 겨를도 없이 일기를 써야만 했다. 끊임없이 우리를 감시하는 목사님의 매서운 눈초리(?) 아래에서...



서안의 비림

서안은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대도시로 꼽히는 도시이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서기 10세기까지 13개의 왕조나 정권이 서안에 도읍을 정하거나 정권을 세웠다. 서안 1,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서주, 진, 서한, 당이 가장 흥성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기점이었던 서안에서는 수많은 역사, 인문, 그리고 경관을 볼 수 있다. 서안의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고성벽과 돌로된 서고라 불리는 비림, 대안탑, 소안탑 등의 건축물은 물론이려니와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세계 8대 기적' 중 하나인 진시황 병마용갱 그리고 중화민족의 발상지 중 하나로 반파유적, 모계사회부터 부계씨족까지의 변천을 볼 수 있는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의 유적지 등 중화고대문명의 진귀한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으니 "오천년의 중국역사를 서안에서 볼 수 있다"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비림(碑林)

서안의 삼학가(三學街)에 자리잡고 있는 섬서성 비림박물관 내에 위치하고 있다. 북송시대 철종 때(1090년)에 처음 지어져 현재까지 9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림은 현재 7개의 대형 진열실과 8개의 회랑 그리고 8개의 비정(碑亭)에 한대부터 청대까지 2300여 개의 비석을 수장하고 있으며, 그 중 1000여 개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서, 예서, 초서, 행서 등의 각종 서체를 비교할 수 있으며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가볼만한 곳이다.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등 중국의 명필가의 글씨는 모두 이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 사진은 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당 현종의 효행비이다.



서안의 성벽

서안성벽은 중국에서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중에서 가장 완정한 고성중의 하나다. 전체 길이가 13.6km, 높이가 12m, 폭이 15m로 높고 두터운 성벽으로 되어 있다. 이 성벽은 명나라 홍무제 3년에서 11년까지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그 역사가 이미 600년에 이른다. 성벽에는 동서남북의 4개문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고, 주변에는 넓고 깊은 호성하(해자)가 흐르고 있으며, 정문에서 시작되는 정로를 가로지르는 조교(弔橋)가 놓여있다.



서안(장안)의 정문

장안은 당나라 때의 서안을 부르던 이름으로 우리에게도 친근한 명칭이다. 당 태종 때까지만 해도 장안의 재정이 궁핍했는데, 당 고종 때부터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다가 현종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며 로마와 함께 세계의 중심지로 등장했다. 당시 장안은 동서 10Km, 남북 8Km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데다가, 인구는 150만 명이었다. 이 중 외국 사신들의 수는 약 4천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정문에는 <천하제일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종루

서안의 종루는 중국에 남아있는 수많은 종루 중에서 제일 크고 보존이 완벽하여, 서안의 상징적인 건축물일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종루는 명 태조 주원장 17년인 1384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외관은 3층, 내부는 2층으로 된 정방형의 누각이다. 처음 건축되었을 때는 지금의 서안시 광제가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명나라 만력 1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의 특징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올렸다는 것이다. 누각 안에 보전되어 있는 종은 고대시대 때 아침을 깨우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서, 새벽에 종이 울리면 성문을 열고 저녁에 종이 울리면 성문을 닫았다고 한다.



아방궁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정복하는 과정에서 경성(북경), 함양(서안)의 궁궐들을 다시 짓게 했는데 이것을 "육국궁전"이라 불렀다. 한번은 진시황이 각지의 12만 영주와 거상들을 함양으로 모았는데, 함양궁에 숲처럼 빽빽히 들어서서 입구까지 꽉 찼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남쪽으로는 위강, 북으로는 고원을 접하고 있어서 앞으로 넓힐 수가 없었다. 이에 진시황은 위강을 메워 남쪽의 평원까지 확장시켰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9년(서기 212년)에는 서주의 풍고 근처에 아방궁을 건설했다.



'아방'이라는 것은 '근방', 즉 함양의 근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처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고, 그 2세가 이어 공사를 계속하게 되었지만, 진왕조의 정치제제와 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농민봉기가 일어나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키면서 아방궁을 불질러버렸기 때문에 폐허로 남게 되었다. 지금의 아방궁은 최근에 복원한 것인데, 그 규모가 작고 조잡하다.



화청지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규모의 당나라 왕실 원림이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일찍이 서주 시기, 주유왕이 이곳에 궁궐을 지었으며, 후에 진시황과 한 무제도 이곳에 행궁을 건립하였다. 특히 당 현종 천보년간에 건설한 궁전누각이 가장 화려하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이곳에는 연화탕, 해당탕, 태자탕, 상식탕, 성진탕 등의 당나라 때 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을 즐기던 탕과 문물이 전시되어 있다.

진시황릉

멀리 보이는 산이 진시왕의 릉(무덤)이다.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여기에 묻혀 있다. 능묘는 37년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둘레가 6㎞, 높이는 40m에 달한다. 무덤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다.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은 등을 이용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그 비밀을 풀 수 없어 과학이 조금 더 발전하여 그 비밀을 풀 수 있을 때 발굴 한다고 한다.



병마용갱 박물관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진시황이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다.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 후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병마용갱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는 병마용갱의 1호 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 갱이 발견되었다. 규모가 가장큰 1호 갱은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 있고, 2호 갱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호 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3호 갱은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 갱이 묻혀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실물크기의 병사 6,000명이 죽은 진시황을 지키고 있다.



병마용

진시황의 병마용 갱은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며,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 여 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관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스타일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진시황릉의 동마차

1980년 12월 진시황릉의 서쪽에서 동마차 2량이 출토되었다. 1톤이 넘는 이 마차의 주조술은 2000년의 세월의 간격을 뛰어 넘는 예술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네 필의 말이 당장이라도 일어나 다릴 것만 같다.



명나라 신종 주익균의 무자비

명나라 13대 신종(만력황제)의 무덤과 무자비이다. 신종 만력황제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목종은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고, 1572년 목종이 병사하자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만력>으로 개칭하였다.

신종은 불과 10세의 어린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신하들이 정무를 잘 보좌하여 정국을 안정시켰지만, 성년이 되어 친정을 펴면서 궁궐의 정원을 수축하는 등 대단위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주색에 탐닉하였다. 이로인하여 극히 부패해진 명나라 조정은 마침내 국고가 탕진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동북지역에서는 누르하치가 만주 여진족의 각 부락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와 대치하였다. 이로써 명 왕조는 이미 멸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은 신종의 공덕비인데, 무자비로 유명하다. 후세들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그를 냉철하게 평가하여 무자비를 세운 것이다.



명 13릉

명 13릉은 명나라 황제 13명의 묘가 있는 곳이다. 영락제의 장릉(長陵)을 중심으로, 이를 둘러싸듯이 헌릉,경릉,유릉,무릉,태릉,강릉,영릉,소릉,정릉,경릉,덕릉,사릉이 있는데,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많은 전쟁들과 그 이후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해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장릉, 정릉, 소릉 세 곳과 신도(神道) 네 곳이 대외에 개방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정릉 지하 궁전은 1956년에 최초로 발굴한 신종 황제능묘이다. 지하궁전은 높이 27m, 면적 1,195㎢의 완전한 석조구조로서 견고하고 삼엄하다.



만리장성

不到長城非好漢(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진나라 시황제의 강력한 통일제국체제가 낳은 상징적 산물이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구축하기 위하여 30만 명의 노동력을 동원했다고 한다.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75km쯤 떨어진 곳에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 "사통팔달"에서 유래된 팔달령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장성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어 만리장성 중에서도 대표적인 구간으로 대부분의 만리장성 관광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만리장성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지기 시작한 장성은 2,0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길이가 5천만m에 이른다. 장성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기후가 온화하고 물자가 풍부한 농경지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단순히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막인 동시에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만리정성

서쪽의 가욕관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산해관에 이르는 6,700km의 성벽은 대부분 명나라 때 개축된 것들이다. 이제는 흘러간 역사의 자취가 된 장성은 세계 7대 건축물,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세계적인 유적지이다.

또 만리장성은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거대한 명성을 만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던 사람들이 일을 하다 죽으면 그 자리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이화원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이다. 특히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더 유명하다. 이화원의 전신은 북경 청의원으로, 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웠을 때 함께 파괴되었다. 그러다가 광서 14년(1888)에 서태후는 해군 군비를 이용해서 다시 재건했으며 이 때 이름을 현재의 "이화원"으로 바꿨다.



이화원 곤명호의 각루

이화원은 본래 평지였던 곳을 파내 만든 곤명호와 호수에서 파낸 흙으로 쌓은 만수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수면이 전체의 3/4을 차지한다. 서태후가 이화원에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둔 목적은 피서와 요양이었으며, 1903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서태후는 이 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부분에 궁전과 생활 거주지구를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화원의 곤명호

이화원의 곤명호는 인공호수이지만, 인공호수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보트와 곤명호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곤명호 동쪽 기슭에 잇는 17 공교의 난간에 새겨져 있는 544마리의 사자도 볼 만하다.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은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정상에 올라서면 이화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광서제가 유폐되어 있던 궁궐

광서제는 어릴 적부터 서태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아침마다 문안을 올리는 어린 황제를 서태후는 황제가 알아듣지 못하는 정책에 관한 말을 늘어놓은 뒤 황제에게 도장을 찍게 했다.그런 일상이 매일 반복되었고 모든 정권은 서태후 손아귀에 들어갔다.

성장한 광서제는 변법자강법(變法自强法)을 통과시킴으로 중국을 입헌군주국가로 변신을 꾀했지만 서태후에 의해서 좌절되고, 돌담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갇혀서 비운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원명원

강남의 유명 정원과 전통 중국 정원의 예술 정화를 한데 모으고, 거기에 서양의 바로크 양식을 가미하여 지어져서 중국인들 사이에서 '일만 개 정원 중의 정원'이라고 불리며, 뛰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원명원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에 타 지금은 폐허로 남아 원명원 유적공원이라 불리고 있다. 황궁의 정원으로서 약 160년간 황제가 기거하며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었던 원명원은 아쉽게도 그 웅장함과 우아함의 흔적만을 느낄 수 있다.



청황실의 놀이터 만화진

황제는 가운데의 정자에 앉아서 등불을 들고 이리저리 헤메는 궁녀들을 보면서 즐거워했다고 하는 황제의 놀이터이다.

황제는 가장 먼저 도착한 궁녀에게 선물을 하사하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고 한다. 실제 도전해 보면 별로 어렵지도 않은 미로인데, 마음이 급한 사람들은 담장을 넘어 정자로 직행하는 조급함을 보이기도 했다.



종루

북경의 종루와 고루는 북경에 사는 사람들에게 시각을 알리는 역할과 성문을 여닫는 신호의 기능을 하였다.

고루에게 시각을 측정하여 북을 치면, 종루에서 그 소리를 듣고, 종을 쳐서 성내에 사는 주민들에게 시각을 알려 주었다.

종루는 한 번은 자연재해로 무너지고, 한 번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45년에 세 번째로 세운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다시 지을 때 그 규모가 축소되어 지금은 고루보다 규모가 작아졌다.



고루

비상시에는 종루와 고루가 경보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 건축물은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고루는 창건 당시의 건축물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여러 차례의 대규모 수리를 거쳐 잘 보존되었다.



후통의 인력거꾼

우리가 북경의 작은 골목인 후통을 모두 잇는다면 후통의 만리장성이 될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북경의역사를 생생하게 반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후통의 인력거꾼은 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헤치고 다니는 시간의 여행자일 것이다.



후통투어

후통은 고대도시 북경이 생긴 이후 존재해온 일종의 작은 골목으로 수 천 개의 후통이 북경에 존재해왔다. 대부분의 후통은 원, 명, 그리고 청대에 형상되었다. 황궁의 동쪽과 서쪽에 형성된 후통의 거주자들은 주로 귀족일가였다.

조잡한 후통은 주로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과 남쪽 구역에 몰려 있었고, 이곳의 거주자들은 주로 상인과 평인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북경의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후통들은 개발논리에 밀려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가 인력거를 타고 후통을 관광하는 것도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왕부정

왕부정은 북경시 최대 번화가로 시 동편에 길게 늘어선 상점거리다. 약 1km가량의 거리 왼편으로 약 100여개의 각종 상점과 호화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일찍이 황실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황실의 우물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왕부정이라 불리게 되었다.

황실이 있던 곳이어서인지 이곳은 아직도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상점과 빌딩이 많으며, 유리창거리가 우리의 인사동거리와 비교되는 것처럼 이곳은 우리의 명동, 압구정거리 쯤으로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상업거리로 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왕부정의 포장마차거리

이번 여행 중에 아이들이 가장 즐거워했던 곳 가운데 하나가 왕부징이었다.



왕부정의 포장마차거리

왕부정은 먹 거리가 가득한 곳으로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다양한 간식거리가 있어서 역시 음식천국이라 불리는 중국을 실감케 한다. 특히 밤이 되면 수십 개의 포장마차가 들어서서 더욱 화려한 불빛으로 행인들을 유혹하는데, 군것질을 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여유가 북경여행을 더욱 즐겁게 할 것이다. 북경의 대표요리인 북경 오리구이 전문점 뿐 아니라 각종 특색있는 요리집과 국제 패스트푸드점들의 간판을 볼 수 있다.

왕부정의 포장마차거리에서 우리 아이들은 전갈, 바닷가제 등 희안한 음식들을 닥치는대로 쩝쩝... 해치웠다.



기예공연

기예, 변검, 소림검법 등으로 구성된 북경의 기예단 공연은 우리 일행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공연을 위해서 흘린 땀방울을 생각하니 편히 앉아서 구경하며, 그들을 평가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기예공연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전통기예의 하나인 서커스는 현재 북경에 그 공연장이 집약되어 있으며, 4곳의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옆의 사진은 중국의 전통팽이를 돌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인데, 그 솜씨가 신기에 가까왔다.



천단

천단은 하늘을 상징하는 사당 건축물로, 명·청나라 황제들이 매년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당시의 황제에 봉해진 자들은 스스로를 천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대자연을 숭배했으며, 천지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제왕의 중요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고대 설계사들은 하늘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 힘을 다했다. 이 건축물은 명나라 영락(永樂) 4년(1406)에 지어지기 시작해서 영락 18년(1420)년에 완성되었다.
 



천단의 기년전

베이징의 천단 안에 있으며, 주위에는 측백나무가 둥글게 에워싸고 있고, 벽돌로 쌓은 단 주위를 약 2m 높이의 낮은 담장이 에워싸고 있으며 주위에 정원이 있다. 동서남북 4면에 문이 하나씩 있는데, 남문 안에는 기년문이 있고, 문의 북·동·서쪽에는 각각 대칭적으로 9칸짜리 곁채가 있다.

기년전은 모든 설계가 우주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데, 용정주라고 불리는 기년전 중앙의 4개의 기둥은 4개절을 의미하고, 이 기둥을 둘러싸고 있는 12개의 붉은 기동은 12개월을, 그 밖의 12기둥은 12시진을, 처마기둥 24개는 24절기를 상징한다. 또한 큰 기둥까지 합쳐 모두 28개의 기둥은 그 당시까지 발견된 별자리 28개를 상징한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이 기년전을 작은 우주로 보고 이곳에서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린 것이다.



인민대회당

북경 시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천안문광장은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다. 그 후 1958년에 네 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광장의 주변에는 여러 개의 인상 깊은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북쪽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안문, 동쪽은 중국 국가박물관, 서쪽은 인민대회당, 그리고 남쪽에는 모택동 기념당이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중국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다. 천안문 광장은 예로부터 대규모 군중시위, 집회, 행렬, 경축 행사 등이 이어지던 곳이다.



천안문광장의 오성홍기

현재 천안문광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볼거리는 해가 뜨는 새벽에 거행되는 국기 게양식이다. 행진곡과 함께 군인들이 정렬하여 나타나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하는데, 이 의식에 걸리는 시간만 거의 30분 정도 소요된다. 국기 게양시간과 강하 시간은 매번 조금씩 다른데, 그 이유는 넓은 중국 대륙에서 해가 뜨고 지는 자리와 천안문 광장의 지평선이 서로 일치할 때를 계산하여 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안문

명나라 때인 1417년(영락 15)에 착공되어 1420년(영락 18년)에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지붕에 황색기와를 얹고 처마 귀퉁이가 하늘로 치켜든 패루였으며 이름도 승천문이었는데, 1457년에 화재를 입어 재건공사를 실시하여 정면 폭이 9칸의 문루식 패루가 되었다. 그러나 1644년에 이자성이 이끈 농민봉기 군대가 베이징을 공격할 때 소실되었다. 그리고 1651년에 다시 복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목조 패루에서 성루로 증축하고 승천문을 톈안먼이라고 변경하였다.



천안문의 화뱌오(화표)

톈안먼 성루 전후에 4개의 화뱌오가 있다. 명의 영락제 때 세워졌고, 모두 한백옥으로 조각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개의 형상을 한, 왕톈허우라고 하는 괴물형상의 동물이 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수로 전해져 오며, 머리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기둥모양의 표식인 화뱌오는 요순시대 때 백성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처음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신문고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자금성의 오문

자금성은 명, 청대의 황궁으로, 천안문으로 들어가 단문과 오문을 지나면 보이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고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천자의 궁전은 천제가 사는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구역"이라는 데에서 연유되었다.

자금성의 전체면적은 72만㎡이며, 총 9999개의 방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궁전 건축물이다. 1406∼1420년에 건조된 이래로 56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5명의 명나라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일생을 보낸 곳이다.

오문은 영어로 'Meridian Gate' 라 한다. 메리디언이란 자오선이란 뜻이니, 이곳이 바로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가 머무는 자금성은 북경의 중심이요, 북경은 중국의 심장이었으니, 자금성은 결국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건청궁

우리 <중국기행>팀이 자금성에 도착했을 때는 2008년 북경올림픽을 앞두고 북경에 있는 대부분의 고건축물들이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천단의 남쪽 건물들, 이화원의 장랑, 자금성의 외전 등의 건물들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건청궁은 자금성 내정의 첫 궁전으로서 명, 청 시기 황제의 침실이며 또한 일상 정무를 처리하던 전당이다.



건청궁의 편액

건청궁 내부를 보면 중앙에 보좌가 있고, 그 위에 정대광명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청나라 때에는 강희 황제 이후 재위 황제가 생전에 황위 계승자를 선포하지 않고 내정한 계승자 이름을 써서 휼갑 안에 봉해 넣고 편액 뒤에 보관해 두었다가 일단 황제가 서거하게 되면 즉시 휼갑을 열고 황제 계승자를 선포하였다.

건청궁의 보좌는 전부 금박을 입히고 루비와 에머랄드를 상감한 금보좌로서 팔걸이와 등받이는 모두 금용으로 휘감았다. 보좌 뒤는 금칠한 병풍이며 병풍 중앙에 8개의 금좌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황제가 자신을 단속하는 격언이다.



운룡대석조

보화전의 뒤쪽에 위치한 운룡대석조는 길이 16.57m, 너비 3.07m, 무게 250톤의 애청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각 작품이다. 이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돌은 운반하는데 3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여의주를 입에 문 9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이런 거대한 돌을 찾아낸 것도 대단하지만 연결된 것이 아닌 하나의 통돌에 새겨넣은 조각작품은 너무 아름다워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자금성

일반적으로 자금성은 외조와 내정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오문과 태화문을 지나면 흔히 '3전'이라 부르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나타난다. 3전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금성의 내정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는 건천궁, 교태전, 곤녕궁 등이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동육궁과 서육궁이 자리 잡고 있다.



자금성의 후원/어화원

자금성에는 나무 한 그루자라지 않고, 풀 한 포기(?)나지 않는다.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소는 철저하게 차단하려는 황제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우거진 나무숲은 언제든지 자객이 숨어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삭막한 자금성의 숨통을 트여주는 공간이 후원인 어화원이다.

어화원은 근엄한 궁궐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정자와 커다란 연못 그리고 각종 신기한 꽃과 나무들이 가득하다. 이곳에서 황실 가족들이 쉼을 가졌으며, 어린 황자(皇子)가 뛰놀며, 어진 심성을 길렀다고 한다.
 



자금성의 신무문

방어의 목적으로 궁전 밖에는 10m 높이의 담이 있는데, 사방에는 성루가 있고 밖에는 넓이 52미터, 깊이 6미터의 호성하(해자)가 흐른다. 4면의 담에는 각기 문 하나씩이 나있는데 남쪽에 오문, 북쪽에 신무문, 동쪽에 동화문, 서쪽에 서화문이 있다.

신무문은 성의 문턱을 잘라놓았는데, 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가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신무문을 나서면 경산공원이 마주 보인다.



경산공원

자금성의 북쪽에 위치한 공원으로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고 고목들이 하늘 높이 솟아있는 황실정원이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경산공원은 1179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명 영락18년(1420년)에 자금성 통자하의 진흙과 석탄을 가져다가 원나라 건축물인 영춘각의 옛 터에 쌓아 두었는데, 이것이 하나의 흙산을 이루게 되었으며 당시에는 만수산이라고 불렸다. 청나라 순치 12년(1655년)에 정원으로 조성되면서 현재의 경산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명 숭정17년(1644년)에는 이자성이 북경을 공격했을 때, 당시 황제였던 숭정은 궁궐을 빠져나온 후 이곳 경산에 올라와 스스로 나무에 목을 걸고 죽었다고 한다.



쇼핑

이번 여행기간 동안 쇼핑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식사를 한 후, 또는 이동 중에 기념품이나 필요한 물건을 눈치껏 구입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만리장성을 둘러보고 북경으로 돌아오는 중에 창평의 식당을 겸한 쇼핑센터에서 마음껏 쇼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있다. 이 아이들은 그 옛날 고구려의 영토가 여기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여행을 마치며

고대 중국은 문명의 요람이었다. 그 영향은 극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에 미쳤다. 중국 문명의 화려함과 복잡함은 수천 년에 걸친 전통에 의해 설명된다. 우리에게 5천년은 신화의 이야기이지만, 그들에게 5천년은 역사의 이야기이다. 그런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문명은 지금 엄청난 양의 보물은 고스란히 햇빛아래 드러내고 있다. 이는 또한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뒷받침하는 물증이며, 또 다른 발굴 작업을 부추기는 동기이다.

이번 여행을 마치면서 우리는 후대에게 어떤 보물을 남길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6일간의 여행, 마치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개선장군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대한민국 땅을 밟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여행의 출발점에 섰다. 이제 떠나야 할 여행은 지난 6일보다 더욱 치열하고, 숨 가쁜 여행이 될 것이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꿈을 향한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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