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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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애국과 반일의 민족교회 형성 조회수 : 2665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한국 교회는 이 민족의 비극과 고난과 위기와 더불어 동행해 왔다. 그래서 이 나라의 교회는 그 어느 나라의 교회보다도 강력한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잡게 된 것이다.

19세기의 교회는 황제에 대한 현저한 충성과 애국의 열정을 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1985년 북 장로교 선교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한국 교회가 가 지닌 가장 흥미있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애국심이다. 주일 아침 배를 포구에 댄 후 마을의 언덕에 올랐을 때 우리는 교회의 첨탑에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은 교회나 기독교인의 집이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교회는 한국을 “한 백성”에서 “한 민족”으로 형성시켜 가고 있었다. 특히 한국교회는 명성왕후의 시해 이후에 감리교나 장로교를 막론하고 함께 정동교회에 모여서 그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예배를 올리기도 하였고, 아관파천(고종이 왕비 시해이후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해서 나랏일을 보던 사건)으로 피하여 있던 고종의 환어를 환영하기 위하여 배제학당의 학생들이 도로 연변에 늘어서서 북받치는 충절로 시위한 일도 있었다. 또한 고종의 탄신일 절기인 1896년 9월 2일에 는 교회가 모화관에 연합으로 모여 축하식을 한 일도 있었다.

선교 초기의 한국 교회는 그 성장이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나 1895년부터 1907년에 걸쳐서 교회는 놀랄만한 성장을 하였다. 그 사이에 모인 교인의 수는 530명에서 26,057명으로 급증하였던 것이다. 성서의 보급도 활발히 이루어 졌는데, 성서공회에서는 1904년 한 해에만 657권의 성서를 발행하였다.

이러한 성장은 주로 서북지방(평안도)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도 특이하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교회가 공산화되기까지 그 힘의 중심으로 평양에 두게된 것이다. 선교활동을 시작한 지 10년만에 평양에는 교회가 135개처, 예배처소가 185개처, 안수 받지 않은 교역자가 21명, 교인이 15,222명, 학교 41개교, 교사가 740명에 이르고 있다.
평안북도 정주와 같은 곳은 당시 2만여 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수는 당시 그곳의 인구를 거의 망라한 막대한 숫자이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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