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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신사참배 1 조회수 : 3787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5-11
우리 교회가 일본의 박해를 받아온 역사는 신사참배의 강요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한국교회의 정신적 핵심을 이루어 왔던 민족주의의 골격을 와해하고자 한국적 전통의 계승을 명분으로 기독교를 저지하고자 시도하던 유교와 불교의 부흥 시도가 미진해지자 이에 당황한 일본은 신사참배라는 걸림돌은 만들어 놓았다.

신사참배란 일본의 천황이나 무사들의 혼령을 섬기는 신사에 전 국민을 참배하게 함으로써 그 충성을 시험할 뿐 아니라, 그러한 국민의 례를 통해서 군국주의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사는 우리나라의 도시나 읍, 면에 까지도 모두 세워져서 참배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는 한일합병이후 강요되었는데, 그 형태는 경축일 마다 일본천황의 사진에 경례를 하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1921년 전국의 선교사들은 진정서를 내고 “이런 신적인 지고성을 부여하는 ‘천황에 대한 예배’는 기독교에 있어서는 전연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20년만 해도 신사와 종교는 관념상 다른 것이었고 따라서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므로 국민의 종교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이 아니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더욱이 1925년 1월 총독부의 정무총장은 신사에 관계된 업무가 총독부 내무국의 사회과 소관으로 옮겨졌다고 공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5년 10월 15일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이 세워지고 ‘천조대신’과 ‘명치천황’이 제신으로 소위 진좌되고 나서는 사태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신사참배가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그 전해인 1924년 11월에 벌써 강경에서는 신사참배에 불응한 그곳 보통학교의 여선생과 수십 명의 학생들이 퇴학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 양상이 격앙되기 시작하였다. 1932년 9월 평양의 서기산에서 거행된 일본군 만주 출정식의 전몰 전사자 위령제에 기독교 학교의 학생의 참례를 막았을 때 평안남도의 지사는 그것은 종교적 행사의 차원에서 가부를 말할 성질이 아니며,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책임에 관련된 것이라 하여 그 참배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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