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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신사참배 2 조회수 : 3715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5-19
본격적인 신사참배의 강요는 1935년 평양의 기독교 학교에 대한 정기적인 신사참배의 강요로부터 시작되었다. 평양은 당시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교회의 세력이 컸었다. 1935년 11월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인 매쿤 박사와 숭의여고 교장인 스누크 여사는 우선 학교 대표자로서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신앙의 양심을 내걸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평안남도 지사는 60일간의 여유를 주면서, 만일 그때도 신사참배를 거절하면 학교폐쇄와 선교사의 강제추방을 불사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자 매쿤은 평양 일대의 27개 교회의 목사들과 함께 모여서 이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는 사항이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심각한 반응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이 결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도지사는 매쿤을 면직하고 미국으로 출국시킨 다음 대대적인 신사참배 강요를 시작하였다.

사실 신사참배에 관하여서는 선교사들 간에도 많은 논쟁이 있었다. 신사참배가 과연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는 것이냐, 아니면 단순한 국민의례냐의 문제였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는 1936년 5월26일 일본의 가톨릭 교인들에게 신사참배는 애국과 충성심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신사에서 국가적 의례가 행해질 때는 충성심과 애국심을 표명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참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신사참배가 진행되자 교회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감리교회는 신사참배에 대하여 일단 국민의례로 받아들이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제3차 연회에서는 미나미총독이 초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로교의 입장은 철저하였다. 장로교에서는 1931년 9월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그것이 부산일보에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1936년에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학교 폐쇄를 결의하였으며, 그 해 10월에는 1938년까지 평양에 있는 모든 학교를 폐쇄하기로 결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8년에 열린 선교대회에서는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 그리고 정신학교의 폐쇄를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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