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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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규상이의 기행문 조회수 : 1838
  작성자 : 김규상 작성일 : 2005-01-18
지난 8월달에 처음으로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그 때는 엄청난 폭우를 겪으면서도 역사기행을 다녀온게 생각이 난다. 그래도 이번은 다행이 춥기만 했다.
첫째날 교회에서 1시간 30분쯤 차를 타고 가니까 행주산성이 보였다. 이 곳은 행주 대첩으로 유명한 행주산성으로 갔다. 이 곳은 임진왜란 때에 후퇴하던 일본군 3만 4천명을 이 곳에서 점멸시켰다. 이 곳에서 부녀자가 행주치마에 돌을 넣어서 나른것에서 앞치마가 유래되었다. 행주산성을 간 뒤 차를 타고 30분 쯤 가니까 덕포진이 나왔다. 여기는 전략적으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적들에게 함락되면 한양이 넘어간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것에서 700미터정도 걸어가면 손들의 묘가 나온다. 손들은 고려때 뱃사공이다. 고려고종때 몽골의 침입을 받자 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갈때에 손들은 왕의 의심을 사 죽고 말았다. 그 다음의 목적지는 강화도 이다 이 곳은 역사가 참 긴 섬이다. 왕이 피난오기도 하였고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기도 하였다. 우리는 강화도에 도착하자마자 덕진진에 가보았다. 덕진진은 바로 앞의 덕포진과 함께 신미양요를 겪었다. 돈데는 군인이 적군으로 부터 나라를 지키려고 만든 소부대이다. 광섬보는 어제연,어제순 장군이 온 힘을 다해서 미국 해병대를 막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던 곳이다. 나라에서는 어제순, 어제연 장군을 위해서 쌍중비라는 무덤을 만들어 모셨다. 공섬보에서 10분쯤 차를 차고 가니까 용두돈데가 나왔다. 용두돈데는 용머리 처럼 생긴 지형에 돈데를 세웠다고 해서 용두돈데이다. 몽골은 우리 나라를 처들어 올 때 이 앞의 바다(염하)때문에 40년 동안 못 쳐들어 왔다. 정족산성, 삼랑성, 단군의 아들 3명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성이다.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 군대를 이 곳에서 격파시켰다. 이곳에서 조금더 등산하면 삼국시대 초기에 세워진 전등사가 있다. 그 것에는 한목수의 증오가 담겨진 나녀상도 있다.
둘째날 우리가 처음으로 간 곳은 마니산이다. 마니산은 해발 468미터 계단수 918개 강화도에서 제일 높다. 그리고 마니산 꼭대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는 첨성단이 있다. 우리는 차를타고 20분쯤 가서 이규보의 묘에 도착했다. 이규보는 고려시대 문인이다. 그는 그 유명한 동국이상국서를 썼다. 또 팔만대장경 기원문도 썼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우리는 이 곳을 지난뒤 차를 타고 선원사지에 갔다. 이 곳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는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살리려고 이다. 팔만대장경 나무판은 국보 제 31호이다. 강화산성 이 성은 허물어지기도 많이 했다. 몽골이 우리나라를 점령했을 때 허물어지고 병인양요때도 불타 없어지고 1977년 다시지었다. 그 다음 우리는 고려궁터에 갔다. 고려 궁터는 39년이나 적군에게 항쟁하며 버티다가 할 수 없이 적에게 항복해 버렸다. 나중에 병자호란이 나자 이 곳에 행궁을 짓고 도망왔다. 그리고 병인양요가 나자 불태워졌다. 강화유수부동헌은 오늘날로 말하면 군청이다. 이 곳에서 사또가 강화도를 다스렸다. 그 다음엔 외규장각에 가보았다. 외규장각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세웠고 불태운 도서관이다. 강화부 이방청은 강화유수부동헌과 비슷한 곳이다. 다만 이방이 근무하던 곳이다. 강화성당은 1898년에 세워졌다. 강화도에 세워진 최초의 개신교 건물이다. 김상용 순의비: 김상용 선생님은 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왔다. 그는 이곳이 점령될때 나는 청나라에 절을 할 수 없다고 화약에 불을 붙여 돌아가셨다. 용흥궁은 강화도령 철종이 살던 곳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 이다. 철정은 안동 김씨가 때문에 정책을 폊이 못하고 33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강화 석수만" 이 문은 홍예문 방식이며 돌의 모양을 맞춰서 다리를 만들었다. 지석묘(고인돌)은 청동기 유물이다. 옛날 족장이나 높은 사람의 묘이다. 강화오층석탑은 고려시대탑이다. 얼핏보긴 4층 이지만 흔적이 남아있어 5층임을 알 수 있다. 화5층석탑은 보물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셋째날, 분오리 돈데는 특히 돈데가 많은 강화도의 돈데 중 하나다. 곳은 바다가 보이는 해안초소이다. 여기는 특이하게 신미양요를 겪지 않았다. 오산리 고인돌군은 옛날 사람들의 공동묘지이다. 고인돌의 종류는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이 있다. 우리가 간곳은 북방식 고인돌 공동묘지이다.그 다음 장소는 임진각이다. 임진각에서는 자유의 다리를 보았다. 그 곳은 6.25 포로를 교환하던 곳이다.그리고 임진각에서 4킬로미터만 가면 북한땅이다. 그 다음 간곳은 반구정이다. 반구정은 황희정승과 관련된 유적이다. 황희정승은 조선초기 사람이며, 원래는 고려사람인데 고려가 망하자 한 사람이 두 왕을 섬길 수 없다며 관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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