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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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역사의 섬 강화를 다녀와서 조회수 : 1645
  작성자 : 도예빛나 작성일 : 2005-02-05



[1월 24일 월요일/역사기행 첫째날]

이번 역사기행은 마지막 국내기행이라서 그런지 더욱더 기대되었다. 이번 역사기행은 다른 때와는 달리 조금 여유롭게 새벽에 교회로 갔다. 지난 번 같았으면 전날에 교회에 와서 친구들과 놀았을 텐데, 아쉬웠다. 어쨌든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엄마와 함께 현대교회로 출발했다.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새벽이라 그런지 바람이 아주 차가웠다.

교회에 도착하니 기연이가 있었다. 세현이와 예슬이는 나중에 행주산성 매표소 앞에서 기행에 합류했기 때문에 나는 행주산성 매표소까지는 기연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행주산성 매표소 앞에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예슬이는 벌써 매표소에 와 있었고 세현이는 우리가 도착하고 나서 조금 뒤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예슬이와 세현이가 기행에 합류한 뒤 우리는 조금(?) 더 시끄러워지고 분위기는 밝아졌다. 우리는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기행을 시작했다.

우리의 제일 처음 목적지는 행주산성이었다. 행주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시대로 추정한다고 한다. 행주산성은 임진왜란때 권율 장군이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 대첩을 이룬 옛 싸움터이다. 권율 장군은 3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는 웃기는 왜장 우끼다를 정말 웃기게 모두 전멸시켜 버렸다.

이 대첩에서는 아낙네들의 활약이 있었다. 왜군들과 싸우다가 성 안의 무기가 모두 떨어지자 아낙네들이 치마를 앞으로 두 겹으로 겹쳐서 돌을 날라 싸움을 돕자 군사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그래서 권율장군이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낙네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더 많은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여자들도 남자들 못지않게, 아니 남자들과 똑같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한번 더 마음에 깊이 새겼다.

어느새 얼어버린 발을 힘겹게 끌고 조금 더 올라가 보니 선조 때 세웠다는 커다란 기념비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주위가 모두 보였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싸움을 했다면 아주 유리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최고가 되어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 토성을 보았다. 이 토성은 삼국시대 때 방어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성은 쌓는 위치에 따라 이름이 바뀐다는 설명을 들었는데, 산에 쌓는 성은 산성, 마을에 쌓는 성은 읍성, 도읍을 둘러서 쌓은 성은 도성이다. 목사님께서는 아무리 성을 쌓아도 마음이 썩으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들 마음에 하나님의 믿음의 성을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다시 따뜻한 자동차 안으로 들어갔다. 자동차 안은 너무나 따뜻했다. 다음 목적지는 덕포진이었는데 덕포진까지 이동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우리는 언 발을 녹일 수 있었다. 우리는 발도 녹였고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기 때문에 기분이 아주 좋아져서 노래를 부르며 덕포진으로 향했다(기연이는 아주 싫어했지만).

덕포진은 조선시대의 진영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언덕에 구멍이 나 있고 그 안으로 조금 파여져 있는(?) 저게 뭘까 하고 궁금해 추측을 해봤는데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예슬이의 추측인 화장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포탄을 쏘는 구멍이었다. 덕포진 앞에는 큰 강이 있었는데 강화해협을 통하여 수도 서울로 진입하려는 적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덕포진을 설치했다고 한다.

덕포진에서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고 이동한 곳은 손돌의 묘. 손돌은 뱃사공이었는데 고려의 고종을 피난시키기 위해 배를 타고 염하라는 물살이 센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염하라는 강은 물결이 빠른데다 휘감기고 중간에 소용돌이가 이는 곳이 있어서 손돌은 이곳을 돌아서 피해가야 했는데 고종은 손돌이 배를 돌리는 것을 자신을 몽고에게 넘기기 위해 그러는 것인 줄 오해하고 손돌을 죽여버렸다. 손돌은 죽기 직전에 바가지를 주면서

“이 바가지를 따라가시면 뱃길이 열릴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고종은 손돌을 죽이고 배를 똑바로 가게 하려고 했으나 물살에 휘말리고 가지 못하자 손돌의 말대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를 따라 배를 움직였다. 그리고 곧 고종은 무사히 육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종은 뒤늦게야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리고는 손돌의 묘를 만들어 주었다.

손돌이 죽은 날은 10월 21일인데 이맘때에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분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바람을 ‘손돌바람’이라 부른다. 아무 이유 없이 죽은 손돌이 불쌍하다. 목사님께서 다른 사람을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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