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유교 도교 발상지 역사기행 | 조회수 : 2461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6-07-31 |
여행을 시작하며
유교와 도교는 중국에서 발생하여 불교와 혼합된 채로 중국에 자리 잡은 종교이다. 2500년 전 공자에 의해 생겨난 유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교훈이었다. 공자는 인간의 바른 삶을 강조하고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회에 덕을 세우도록 가르쳤다. 지금의 유교의식은 훗날에 더해진 것이고, 원래는 예배장소나 의식이 없었다.
도교는 유교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유교가 인간윤리를 다루는 것이라면, 도교는 우주에 대해 가르친다. 도교는 '길'이라는 뜻인데, 추상적인 원리들에 대해 논하고 있어서 평범한 말로 옮기기가 힘들다.
사소한 것까지도 중국의 것이라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유교와 도교를 받아들여 정착시켜왔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의식과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친 종교이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유교와 도교의 발상지를 돌아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구원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맛보려 한다.
페리 여객선
위동항운의 뉴골든브릿지5호(28,630t급)는 인천-칭다오 구간을 취항하는 최신예, 초호화 여객선으로 노래방, 면세점, 오락실, 레스토랑은 물론 바다가 보이는 사우나, 영화관, 에스컬레이터까지 갖추고 있다. 객실은 최고급인 프레지던트실에서 일본식 다다미방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 팀은 2층 침대의 단체여행객 숙소를 이용하였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뱃길을 이용한 여행이라는 점에서 즐거운 경험이었다.
위동페리 뷔페
위동페리에서는 뷔페형태로 식사를 제공하는데, 주 메뉴는 가격에 따라 다르게 선택할 수 있다.
청도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 도시인 청도는 젊은 도시이다.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이곳에 1891년 청 정부는 군사를 파견하여 청도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7년 11월에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고, 1914년 11월 독일에 이어 일본에게 점령당했다.
1922년 12월에 회복되었지만, 1938년 1월에 일본에 의해 다시 점령당했다. 1945년 8월 항거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에 국민당 정부에 의해 회복되었으나, 곧 미국의 해군 기지가 되었다.
시내 곳곳에서 독일식, 스페인식, 일본식 등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청도의 과거 식민지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그 영향 때문에 청도는 '중국속의 유럽'이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특히 근 20년 이래로 청도는 놀라운 변화를 이룩하여 대외 무역 항구, 해양 과학 연구 도시, 관광 도시 등의 특성화된 도시로 성장하였다.
잔교
칭따오의 상징인 잔교는 1891년(淸의 光緖 17년), 독일군과 일본군의 침략을 막기 위한 군용 시설로 만들었으며, 1931년 보수 공사를 해서 길이 440m, 폭 10m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잔교 앞부분에는 2층 건물인 회란각(回瀾閣)이라는 정팔각형 누각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황해와 칭다오의 거리 풍경을 360도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이곳을 방문하던 날은 안개가 많아서 잔교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팔대관 화석루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팔대관은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행객을 비롯하여 치료를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으며, 중국의 유명한 과학자나 예술가들이 이곳에 와서 휴양을 즐기기도 한다.
제2해수욕장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화석루"는 팔대관(八大?)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대저택이다. 서양의 여러 종류의 건축예술품을 합쳐놓은 유럽풍 고성 형태의 건축물로 그리스와 로마식 품격과 고딕양식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다. 5층으로 된 건물의 꼭대기에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으며, 옆에 첨탑이 있다.
예전에 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 가기 직전에 이곳에 머물렀었다 하여 '장개석 건물'이라고도 불려진다. 아름다운 정원과 이국적인 건축물로 인해 중국에서는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곳이다.
중국의 공중전화
팔대관 거리에 삐딱하게 서 있는 공중전화가 이색적이다.
팔대관 별장지구
‘만국건축박람회장’이라고도 불리는 팔대관에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스페인, 일본식 등의 24개 국가 200여종의 건축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이 곳이 개발되기 시작할 무렵인 1920년대에 8개의 관문이 있었다는 데에서 '팔대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에는 팔대관의 도로가 늘어나서 10개에 이르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팔대관이라고 부른다. 10개의 관문의 이름은 산해관, 정양관, 가욕관, 문승관, 자형관, 정무관, 거용관, 소관, 함욕관, 임진관이다.
오사광장
오사광장은 오사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광장이다. 오사운동은 1919년 5월 4일 중국 북경의 한 학생이 일으킨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으로 중국 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운동으로 평가된다. 광장 중앙에는 "오월의 바람"이라는 조각품이 서 있는데, 바람이 부는 모습에 낙엽의 색채를 입혀 표현한 것으로 오사운동의 반봉건제 애국주의의 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민족역량의 증진을 상징하고 있다.
청도에서 점심식사
청도의 음식은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있었다. 중국 여행을 하다보면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되는데, 청도 정도라면 문제가 전혀 없을 것 같다.
중국 관광버스
산동성 여행 기간 동안 우리를 태우고 다닌 버스와 김구수 가이드선생님
노산의 도교사원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해도 동해의 노산만 못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 내에서 노산은 명산으로 꼽힌다. 황해에 바로 인접해 있는 이 산은 바닷가에 있는 산 가운데 가장 높은 산으로 꼽힌다. 이 산은 도교의 발상지이며, 본거지인데, 노산의 도교 사원은 매우 유명하다.
옛날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할 목적으로 노산에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산 곳곳에 남아 있는 비문들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산에는 72개의 도교 사원이 있고, 중국에서 두 번 째로 큰 도교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도교의 상징
사진은 도교의 상징인 팔괘와 태극무늬이다.
도교 발상지 답사
도교의 발상지인 노산의 태청궁 입구에서
태청궁에는 천년이 훨씬 넘은 나무들이 즐비하다. 이 도교사원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태청궁의 삼관전
이곳은 태청궁의 중심이 되는 전각인데, 도교의 승려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다.
곡부에서 저녁식사
청도에서 자동차를 타고 5시간이 넘게 달려서 도착한 곳이 곡부이다. 곡부로 이동하는 중에 휴게소에 들리기도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휴게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지저분하고, 사먹을 만한 것도 별로 없고 ... 곡부에 도착한 후 호텔식당에서 먹은 늦은 저녁식사는 청도에서 먹은 것보다 더 중국적이어서 먹기가 힘들었다.
양은 많은데 먹을 것은 없고...
중국음식이 담긴 접시가 나올 때마나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곡부 야시장
중국의 야시장은 한국의 야시장과 분위기가 흡사하지만 소도시나 시골로 내려갈수록 위생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음식을 사 먹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인들은 음식을 밖에서 사먹는 문화가 발달해 있기 때문에 야시장에는 언제나 사람으로 붐빈다. 그래서 소매치기가 많고, 이것저것을 사려고 살펴보는 아주머니,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 손님을 부르는 삐끼, 노숙자, 힘없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 등이 많다.
따라서 여행객들이 야시장을 구경하러 나갈 경우에는 여권이나 지갑 등은 특히 조심해야 하고, 여성이나 어린이 그리고 혼자서는 야시장이나 밤거리를 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 중국의 치안상태는 그리 양호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대도시의 번화가나 공적인 장소에서는 외국인에게 문제가 별로 없고 친절하게 보이지만, 야시장이나 동행자가 없는 개인관광객은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곡부의 야시장의 위생상태를 감안할때 여행객들에게 그리 권할만한 장소는 아니지만 중국의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다.
공자와 곡부
곡부는 산동성 중남부에 위치한 공자의 고향으로, 세계적인 관광지이며, 춘추시대(기원전 770~476년) 때 노(魯)나라의 도성이었다. 매우 작은 소도시이며, 관광지가 밀집되어 있는 구 시가지에는 고층건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래된 건축물, 공원부지, 정비된 반듯하게 트인 도로 등으로 인해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도시이다. 시내에는 공묘(孔廟 공자를 기린 사당), 공부(孔府 공자 및 그의 대대손손이 살던 집), 공림(孔林 공자 및 그의 자손들의 세계최대의 가족묘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곡부의 오래된 성벽
곡부에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성터인 노국고성(魯國古城)에 일부 성벽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공묘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 사후 1년에 사당을 세운 곳이다. 그 후 역대의 황제가 기부나 희사를 계속하여 현재의 규모가 되었고, 북경의 고궁, 태산의 대묘와 더불어 중국 3대 건축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전각들이 격에 따라 남북축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남북의 길이가 약 1㎞ 남짓하며, 면적은 약 22만㎡로서 전체 건물의 방의 개수가 466개에 이른다.
중국 현지 가이드에게
공묘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팀
공묘로 들어가는 입구의 향나무 숲길
공묘의 석비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으로 공자의 사상을 반대하는 투쟁이 기승을 부리자 홍위병들은 공묘에 있는 공자의 석비를 무너뜨려 두 조각으로 깨뜨렸다. 공자는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복귀시키려는 자본주의자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최근 석비를 이어붙인 흔적이 선명하다.
석비 전각
규문각을 지나면 거대한 비석을 보호하는 13비정(十三碑亭)에 53개나 되는 비석이 있다. 비신 옆면에 원기둥이 세 개씩 돌출되어 있고, 각형의 개석과 비신 주연에 운룡문이 가득하고, 귀부 기단에 수파문이 조각되어 있는 등 다른 곳의 비석과는 다른 점이 있다. 가장 오래 된 것이 719년 때의 것으로 비석 옆면에 당, 송, 원, 명, 청 각 시대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1308년 9월 황제(무제)와 그의 누이가 이곳을 찾아왔다고 씌어 있는 비석이 있다. 조선시대에 서원에 여인들이 출입할 수 없었듯이 여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원 황제의 누이는 여성으로 공묘를 방문한 최초의 인물이다. 열세 개 비정 가운데 청대 때의 것이 아홉 좌, 금과 원의 것이 각각 두 좌가 있다.
행단과 향시계
공자가 제자들과 가르치고 토론했다는 곳에 단을 만들고 단을 세운 행단이 있다. 공자를 기리기 위해서 이 교수당 자리에 대성전을 세웠으나 1018년(송나라 진종) 대성전을 북쪽으로 옮기고, 그 주위에 살구나무를 심었던 것을 금나라 때에 전각을 세웠다 한다.
현재의 행단은 정자형 지붕을 한 중층으로 사방이 틔어있으며, 청나라 고종이 친필로 세운 행단찬비를 비롯한 비석들이 있다.
공자가 제자들과 가르치고 토론했다는 행단 앞에 원과 육각을 조형 형태로 채택하고 운룡을 조각한 조형미가 뛰어난 대석이 있다. 이 곳에 향을 피워서 향이 다 탈 때까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규문각
홍도문과 동문을 지나면 중국 고대 10대 명루(名樓) 중의 하나인 규문각(奎文閣)이 나온다. 규문각은 높이 23.35m, 폭 30.1m인 3층 누각으로 3층 지붕 밑에 규문각(奎文閣)이란 세로의 편액이 걸려있다.
2층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원형 주춧돌 위에 석북을 놓고 팔각형 기둥을 세운 것이 이채롭다. 원래는 1018년(송나라 진종)에 건립할 당시에는 장서루 1191년(금나라 장종)에 중수하면서 규문각이라 개칭했다 한다.
현재 공묘의 전각들은 대부분 명청 시대 건립한 것으로 규문각이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단청의 명도가 높으며 납작한 화문이 이채롭다.
공묘의 대성전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은 북경 고궁의 태화전에 이은 제2의 대건축으로 높이 24.8m, 폭 45.7m, 길이가 24.9m이다.
공자는 면류관을 쓰고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홀을 잡고 있다. 소상의 복장은 제왕에 해당하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소상은 문혁 때 파괴된 것을 1982년 황금 48량을 들여 복원한 것이라 한다. 동서 양편에 소상 4위를 배향했는데 안연, 증자, 자사, 맹자의 소상으로 면류관을 쓰고 있으나 장식이 공자의 것에 비하여 단순하다.
소상 앞에는 북경에 있는 공묘와 마찬가지로 제기와 제례악기가 진설되어 있다. 만세사표를 비롯한 편액과 주련이 여러 개 걸려있다. 남색(감청색) 바탕에 글씨를 양각하고 테두리에는 황룡을 조각하였는데 편액 자체가 공예품이다.
대성전의 돌기둥
돌기둥(높이 6m, 지름 0.8m) 28개가 황색유리기와를 올린 높이 32m, 폭 54m, 길이 34m의 거대한 중층 건물을 받치고 있다. 특히 정면에 있는 10개에는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용 두 마리를 양각하였는데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다.
공묘의 대성전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은 북경 고궁의 태화전에 이은 제2의 대건축으로 높이 24.8m, 폭 45.7m, 길이가 24.9m이다.
대성전에는 유미민생(有未民生 : 백성이 생긴 이래 공자와 같은 사람은 없다)이라는 대형 편액이 초층 문 입구에 걸려있고,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닫집을 짓고 공자상을 모셨으며, 위패에는 지성선사공자신위(至聖先師 孔子 神位)라 써있다.
공묘의 가계비_1
공자의 자손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인데, 비와 바람에 풍화되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다.
공씨의 가계비_2
숭성사 앞 왼편에 공자 가계족보를 새겨놓은 공씨세계비(孔氏世系碑)가 있다. 음각을 하였는데 희미하여 볼 수가 없다.
공부
공자의 역대 자손들이 살던 저택과 관공서를 겸하고 있던 건물이다. 송나라 때인 1039년에 세워져 여러 번의 개축 후, 청나라 때 대규모로 만들어졌다. 송나라 때 공자의 종손을 ‘연성군’으로 봉한 후 곡부를 다스리던 관청이자 거주지인 셈인데, 역대 황제들이 증축과 재건축을 거쳐서 자금성에 견줄 만할 정도로 위용을 자랑한다.
문은 공부로 들어가는 정문인데, 지금을 굳게 닫혀 특별한 귀빈이 방문할 대만 이 문을 열어 영접한다.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이 이 문을 통과하여 환영을 받았다.
탐 (탐욕을 상징하는 동물)
공부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가족들이 거처하는 내채 입구에 있는 벽화. 거울 대신에 만든 이 벽화는 곡부의 통치자이자 공자의 직계 장손이 아침마다 대성전으로 집무를 보러 나서면서 마음을 추슬렀던 곳이다. 탐욕을 상징하는 동물이 태양마저 삼키려 하는 이 그림을 보면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했다고 한다.
공부의 안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공자가문을 이른바 ‘천하제일가문’으로 보호해왔던 것이다. 현재에도 공부는 자금성과 비슷한 규모의 성벽으로 4면을 보호하고 있다. 성벽 앞에는 땅을 파서 인공적으로 강을 만든 해자(垓子)도 있다. 이는 공자 가문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 황제가 살던 자금성과 같이 공부를 보호했던 것이다.
공부는 공자의 직계 장손들이 2500년 동안 거주하던 관저의 안채이다. 송나라 때 공자의 종손을 ‘연성군’으로 봉한 후 곡부를 다스리던 공자의 후손이 머물러 살던 살림집이다.
공부의 후 화원
후 화원은 공부의 제일 뒷면에 있으며 이 화원은 명나라 때 건설하였다. 화원 내에 태호석가산과 각양각색의 특이한 꽃과 풀이 있어 볼거리 또한 가득하다.
후 화원에 있는 신기한 그림
이 그림은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정면을 향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신기한 그림이다.
공림
공림은 묘가 약 2만기, 담장둘레만 7.25km로 세계최대의 씨족묘지이라 할 수 있다. 곡부시의 북쪽을 따라 1km 정도 숲길을 지나면 '지성림(至聖林)'이라는 현판이 걸린 공림의 대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공림이 시작된다. 공림이라는 이름은 수많은 묘비의 비석이 숲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 공림(孔林)은 공자가 세상을 떠난 2년 후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공자를 뒤이어 이 곳에 장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공림의 면적도 점차 늘어났다.
공림으로 들어가는 향나무 숲 길
공림의 정문인 지성림방이 있고 여기서부터 이림문까지 떡갈나무 숲이 길게 이어진다. 다시 이림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수수교가 있고 이 다리의 북쪽, 향나무 숲길을 따라 들어가면 공자 축제 시에 향단을 설치하는 곳인 향전이 있다. 이곳은 또 해방전쟁 당시, 중국의 군사 지도자였던 주덕 총사령관이 중요한 군사회의를 연 곳이기도 하다.
공림으로 들어가는 입구
곡부(曲阜)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공자와 그 가족들의 전용 묘지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가족 묘지이다. '지성림(至聖林)'이라고 새겨진 음각이 뚜렷하다.
공자의 묘
공자의 묘는 향전 뒤 쪽에 있는데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고 씌어져 있다. 명성에 비해 그리 화려하지는 않고, 돌보지 않은 듯 풀이 우거져 있으며 무덤 가운데 거목이 자라고 있다. 이렇게 공자의 묘를 돌보지 않는 이유는 중국의 대 사상가인 공자의 무덤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는 중국인들의 신념 때문이다.
공림과 진시황제
천하를 통일하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봉건통치를 시작한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고, 화폐를 통일하고 군현제 등을 실시하였다. 또한 사상을 통일하고, 유생들이 조정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시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승상 이상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의 모든 책을 불살랐고, 공자의 사당을 헐었으며, 공자의 묘로 향하는 맥을 끊기 위하여 도랑을 팠다.
공자의 무덤 앞에서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생명의 종착점은 과연 어디인가? 생명의 마지막 저녁 노을이 거무스름한 하늘가에서 조금씩 소멸해 갈 때, 삶을 향한 최후의 노력은 고요한 암흑 속으로 침몰한다. 생명은 끝내 최후의 몰락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고독한 여정에서 지친 방랑자를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무덤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공자는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새로운 시작으로 보신 것이다.
자공의 묘막
공자는 자공에 대하여 “대단히 영리하여 그의 슬기로운 판단은 모두 적중했다."고 칭찬했다. 공자의 사후에 모든 제자가 삼년상을 입었으나 유독 자공만은 무덤가에 묘막을 짓고 육년이 지난 후에 돌아갔다. 그 후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각각 대부의 벼슬까지 올랐다가 제나라에서 죽었다.
공자의 아들 공리의 묘와 손자 자사(공급)의 묘
공자의 묘 옆에는 아들의 무덤이 있으며, 그 앞쪽에 공자의 학문을 계승한 손자 자사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묘의 배치는 공자가 아들을 데리고 손자를 안아주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묘
유교의 고전인 중용을 지은 사람으로 자사는 호이고, 본명은 공급(孔伋)이다. 자사는 맹모 삼천지교(三遷之敎)와도 관계가 깊은 분인데, 맹자가 어머니와 처음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였다. 놀 만한 벗이 없던 맹자는 늘 곡을 하면서 장사지내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이 광경을 목격한 맹자의 어머니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사를 했는데, 하필 시장 근처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장사꾼들의 흉내를 내면서 노는 것이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도 아이와 함께 살 곳이 아니구나 하여 이번에는 글방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맹자가 늘 글을 읽는 놀이와 예법에 관한 놀이를 하고 놀았다고 한다. 이때 맹자의 어머니가 이사한 글방이 자사의 서당이었다.
이곳에는 공자 후손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중국의 군고구마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로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식량으로 재배되어 왔고, 그 후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영조대왕 당시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들여온 것이 처음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공림을 답사한 후 길가에서 군고구마 파는 아주머니를 만난 것이었다. 우리 답사팀이 공림에 들어갈 때부터 미리 예약해 둔 군고구마는 우리나라의 군고구마와는 크기부터가 달랐다. 보기만 해도 단맛이 느껴질 정도로 샛노란 군고구마... 하나만 먹어도 든든할 정도의 크기의 군고구마를 먹는 맛은?
띵호와~~ 우리 살람 군고구마 맛있어 해~~
태산에 오르는 케이블카
중천문에서 남천문까지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남천문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천국의 경계선이라고 하는 승선방이 있고, 여기서 20분 정도 오르면 태산의 정상인 옥황봉에 도착한다.
태산
중국 오악의 첫 번째인 태산(太山)은 예로부터 영혼이 깃든 산이라 여겨져 중국인들에게 숭앙되고 있을 뿐 아니라, 역대 중국의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행한 신성한 산이다. 그래서 태산에 붙여진 이름이 ‘오악독존(五岳獨尊)’이다. 동쪽의 태산, 서쪽의 화산, 남쪽의 형산, 북쪽의 항산, 중앙의 숭산 등 중국의 오악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는 말이다. 산세는 다른 산에 비해 떨어지지만 태산의 역사가 그만큼 깊으며, 해가 떠오르는 동쪽 끝에 있는 신령한 산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상인 옥황봉 바로 밑에는 오악독존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해발 약 1,545m로 산동성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7412개의 돌계단이 정상까지 놓여 있고, 산기슭에서 정상까지 9km정도의 거리다.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6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올라가는 길에 수많은 비석과 묘당을 볼 수 있다.
태산의 천가(天街)
해발 1545m의 태산 꼭대기에 오르면 하늘의 거리, 천가(天街)에 닿는다. 구름과 안개에 둘러싸여 지나온 발자취마저 모두 사라지고 어느덧 신선이 산다는 천계로 들어서는 곳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산이 없는 광활한 평야 지대에 산이라면 오로지 태산뿐이다.
천가에서 바라본 벽하사
중국인들이 일평생 한번 오르고 싶어하는 영혼의 고향이요, 신선이 산다고 믿는 도교의 성산이기도 하다. 태산에 오르는 정문인 ‘일천문’에서 부터 정상 부근에 있는 도교 사찰인 ‘벽화사’까지 거의 수직으로 놓여 있는 7412개의 돌계단과 58개의 도교 사찰, 그리고 고적 128곳 등, 그 웅장 한 규모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벽하사에 오르는 계단
벽하사에 오르는 계단에서 아래를 굽어보면 마치 돌계단이 천계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인양 아찔한 절벽이다. 저 발아래 구름에 보이지도 않는 속세를 멀리하고 천가를 지나 신선이 사는 옥황봉에 오르면 천하가 내 것이 된다.
천가를 지나 옥황봉에 오르는 길목에서
태산의 길목마다 산재돼 있는 수많은 비석과 비문은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실감케 한다. 태산은 그 자체로 역사의 교과서이다. 또한 중간에 설치된 좁은 난간에서 바라본 기암괴석과 주변의 풍광은 경이롭게 다가온다. 그 당당하고 신비한 자태로 인하여 예로부터 72명의 황제가 태산에 와서 제사를 지냈고, 이백, 두보, 양사언 같은 많은 문인들이 주옥같은 문학을 낳았다. 공자도 두 발로 태산의 정상에 오른 후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태산 정상의 사당에 오르는 계단
이 계단만 오르면 정상인 옥황봉이다. 태산은 과연 계단의 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질리도록 많은 계단을 걸어 정상에 오르게 된다. 양사언의 시조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을 되 뇌이며 한 계단 한 계단 꾸준히 올라야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태산의 정상 옥황봉에 세워진 미료헌
천가를 지나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곳. 천하에 이보다 더 하늘이 가까울 수 없는 곳엔 송나라 때 지어진 사찰이 있다. 이곳에는 관광객들에게 열쇠고리, 향, 자물쇠 등을 팔며 태산 꼭대기에서 자신의 삶을 꾸리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와 과거가 묘하게 뒤섞인 그들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은 지금의 중국 현실을 보여주는 듯도 하고 결코 저 아래 세상과는 융화될 수 없는 그들의 색깔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미료헌은 태산의 산신을 보신 사당이다.
오악독존_태산
중국에는 예로부터 산악신앙이 있었는데, 전국시대 이후 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아 5악의 관념도 생겼다. 동악(東岳)은 산동성의 태산(泰山 1,524m) 서악(西岳)은 섬서성의 화산(華山 1,997m) 중악(中岳)은 하남성의 숭산(嵩山 1,440m) 남악(南岳)은 호남성의 형산(衡山 1,290m) 북악(北岳)은 산서성의 항산(恒山) 2,052m)이다. 이 산들의 정상 또는 산록에는 도교의 사찰이 많이 있고,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낸다. 그 가운데 태산은 진시황이 봉선의식을 행한 이후 역대 72명의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행한 신성한 산이어서 오악독존이하 부른다.
벽하사
송나라 때 지어진 벽하사는 역대 황제들이 즉위할 때마다 하늘에 신고식을 치룬 도교사원이다. 지금도 매년 3월에 봉선의식이 재연되는데, 그 때마다 중국 전역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양가부민속촌
산동성 중부에서 민간 풍속과 전통공예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온 도시인 유방(위이펑)은 유구한 수공업, 제조업과 민간공예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남부에 소주가 있고, 북부에는 유방이 있다는 말은 수공업이 발달했던 당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중국의 4대 연 생산지의 하나이고, 3대 세화생산지의 하나인 유방을 연의 도시라고도 한다. 1983년부터 해마다 이곳에서 국제 연날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이곳의 가로등은 각양의 연 모양으로 예쁘게 만들어져 있다. 바로 이 도시에 양가부 민속촌이 있다. 유방에서도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양가부촌은 옛날 주택들이 이곳저곳 자리 잡고 있으며, 오랜 홰나무가 마을 중심에 솟아 있다. 그래서 양가부 지구에 들어오면 흡사 고대도시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이곳은 목각 세화와 연 만드는 것으로 중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양가부 민속촌의 전통 연 공방
연은 지금에 와서 일종의 민간 놀이기구이며, 또한 공예품이다. 가는 찰대로 뼈대를 만든 후 다시 얇은 종이를 붙이고, 기다란 실을 매서 만든 것으로 바람의 힘을 빌려 연을 공중에 날리는 것이다. 최초의 연은 오늘날 사람들이 본 모양이 아니었고, 연을 발명한 목적도 놀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연을 풍쟁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쟁이란 말은 거문고와 비슷한 13현의 악기중 하나이며, 풍경이라고도 하였다. 바람으로 인하여 연에 매달은 호루라기 같은 물건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 쟁의 소리와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전통 연을 제작하고 있는 기능인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연은 춘추시대에 로반이라는 사람이 처음 발명했다고 하는데, 그는 하늘에서 매가 빙빙 돌며 나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참 대나무를 깎아 매의 형상으로 만들었기에 죽요라 칭하였으며, 하늘에 오르면 3일안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연이었다고 전해진다. 후에 종이를 발명하여 종이가 참대를 대신하여 간편한 연이 만들어 졌는데, 죽요와 구별하기 위하여 지연(종이연)이라 불렸다.
세화 기능인
송나라 때 목판인쇄술이 세화제작에 도입되었다. 이때부터 세화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판매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다. 당시 세화의 내용은 자연숭배와 신령숭배로부터 즐거운 경사로 발전하여 사람들의 정감과 이상을 구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화는 천진의 양유청, 산동유현의 양가부, 소주의 도화오, 하남의 주선진 등에서 주로 제작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만들어 진 목판세화는 모두 선명한 지역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양가부 민속촌의 사합원
사합원은 명료한 위계질서를 가진 중국의 전통주거 유형이다. 그것은 원자라고 불리는 중정(가운데 마당)을 둘러싸고 건물들이 배치되는 중정형 주택이다. 이같이 하나의 중정을 둘러싸는 네 건물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사합원의 공간구성은 이미 한나라 때(B.C.206~A.D.220)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합원은 전통 중국 사회를 지배해 온 유교의 제도가 구현된 주택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징과 같은 도시지역에서 사합원은 후통(胡同)이라고 불리는 골목길을 따라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양가부 민속천의 가옥구조도 사합원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소어산 공원
도시 남쪽에 있는 어산로와 복산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해발 60m 높이의 산으로, 남으로 회천만과 접해 있으며 북으로 팔관산과 인접해 있다. 예전에는 아문산이라 불리던 이곳은 1922년 이 산을 둘러싼 도로를 어산로라고 부르면서 산의 이름도 소어산이라 불리며, 정상에 있는 누각이 자연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준다. 산 정상에는 관조각을 비롯해 18m 높이의 3층 8각탑이 있고, 누각 아래로 벽파정과 옹취정 등의 쉴 곳이 있다. 또 산의 동편에는 산세를 따라 건축된 3층 건물의 다실이 있어서 바다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차 한 잔을 마실 수도 있다.
소어산 공원에서 내려다본 독일 식민지 시대의 가옥
1897년 11월, 독일이 청도를 강제로 점령하여 청도는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당시 독일은 자국의 선교사 두 명이 중국인들에게 살해당한 것을 빌미로 청도를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청도를 점령한 독일군의 속셈은 극동지역에 독일 해군의 전진기지를 확보하려는데 있었다. 독일군이 청도에 진주하면서 그 전까지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에 현대식 도시가 세워지고, 항구시설이 갖추어졌으며,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자연히 상업지구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유럽풍의 건물들이 소어산을 중심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독일 총독관저
1897년 독일이 청도를 점유했을 당시 독일 총독의 관저로 지어진 건축물인데, 독일의 전형적인 성 건축양식을 따랐으며, 현재 유럽이나 독일에서조차 영빈관과 같은 풍격의 건축물을 보기 힘들다고 한다. 영빈관의 외관은 기세가 웅장하면서도, 내부는 궁정식 목조골격으로 이루어졌다. 옛 보루형태의 성은 30미터 높이의 황색이 주조를 이루는 담과 화강암의 소박한 장식, 정문 담장 위의 연녹색과 연회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태양무늬 장식, 담의 모서리마다 우뚝 세워진 석주 등 중국 안에서 유럽의 이국적인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곳이다.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재탄생한 후에도 모택동 주석이 이곳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보냈으며, 정치적 회의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영빈관의 응접실
한때 모택동이 혁명 동지들과 회의를 하며 머물던 이곳의 내부는 큰 홀, 벽난로, 샹드리에, 서재 등이 잘 단장되어 있다.
영빈관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영빈관의 2층에는 모택동과 그의 동지들이 사용하던 방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 가운데는 임표의 방이 있는데, 임표는 한국전쟁 때 중공군의 참전을 반대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도착한 주은래와 임표는 몇 가지 이유를 내세워 참전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최악의 경우에는 북한을 포기한다는 카드를 내보이면서 중국의 참전을 유도했고, 결국 모택동은 중공군의 참전을 결정하고 만다.
영빈관의 벽난로가 아름답다.
독일 교회당
원래는 '국제예배당'이라고 불려졌으며,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종표루자(鐘表樓子)라는 명칭으로 통하는 교회이다.
독일의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908년 기공하여 1910년 완공된 아름다운 비잔틴 양식의 독일풍의 루터교 예배당이다. 현재는 신호산 기슭의 주택가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 39m의 종탑에는 별도의 요금을 내면 올라가 볼 수도 있다. 이곳에 오르면 100여 년 전에 건설한 유럽풍의 시가지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건립당시 설치된 종과 시계는 지금도 정시에 가동되고 있다.
루터교회의 설교단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후 교회가 설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단을 만들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형태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 설교단인데, 유럽에서는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가 이러한 형태의 설교단을 가지고 있다.
세례를 받은 것을 축하하는 찬송을 부르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팀을 가이드한 김구수 가이드 아저씨가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허락해 주셔서 아저씨의 삶에 하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중국의 트롤리버스
종류로는 우리와 같은 모양의 버스와 차량 두 대를 연결시킨 주름버스, 이층버스, 전선줄로 운행되는 트롤리버스가 있다. 버스요금은 구간마다 차이가 있으나 기본요금은 1위안(약 130원)부터 있으며, 요금은 승차시 안내원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지불하면 된다.
위동페리
위동항운의 뉴골든브릿지5호(28,630t급)는 인천-칭다오 구간을 취항하는 최신예, 초호화 여객선이다.
여행을 마치며
누군가 사랑이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사치라고 하였다. 얼마나 사랑이 희귀한 시대가 되었으면, 진정한 사랑을 귀부인의 사치품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을까? 사랑이 사치품이라면 나는 이 아름다운 사치품으로 주렁주렁 장식하는 사치를 누리고 싶다.
사랑이 사치품이라면 여행은 일용품이 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요즘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여행을 떠난다. 나도 한 해의 많은 시간을 여행과 함께 보내고 있다. 사는 것 자체가 여행이고, 내가 걷는 모든 걸음이 여행이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먼 여행이 아니라도 매일 가는 등굣길이나 출근길에서도 여행을 만난다.
날마다 여행 속에서 살고 있던 우리가 이번에는 날마다 삶 속에서 만나던 유교와 도교를 찾아 바다를 건넜다. 사랑하는 이들을 사치품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4박5일의 짧은 여행, 그러나 2,500년의 길고 긴 여행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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