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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조선의 가톨릭 박해 - 2 조회수 : 2469
  작성자 : 박행신 작성일 : 2003-02-11
병인교난은 시작되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었다. 대원군에게 프랑스와의 교섭을 주선하던 남종삼과 그 일족이 고향에서 잡히고, 베르누를 비롯한 프랑스신부 5명은 체포되어 대원군의 친국을 받은 후 국외로 물러갈 것은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 일로 조선인 교도들은 서소문밖 형장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고, 프랑스 신부들은 한강변의 새남터에서 참형을 당했다. 이렇게 시작된 교난은 전국으로 퍼져갔는데, 이 교난에서 희생된 순교자의 수는 이후 3년간 무려 8천명이나 되었다. 이 수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신빙성있는 통계이며, 이 외에도 난리를 피해 산과 들로 방황하다가 죽은 사람이 수를 합치면 그 수는 배가 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1866년 이른 봄에 시작된 병인교난은 단순히 국내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고, 마침내 프랑스와의 충돌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초래하고야 말았다. 교묘하게 눈을 피해 다니던 프랑스의 리델 신부가 동료 신부 두 사람과 함께 충청도 해안을 빠져 나가서 두 사람의 신부는 그곳에 남고, 리델은 조선인 교도 11명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중국 산동성에 있는 지푸를 향해 출범하였다.

지푸에 도착한 조선인 교도들은 엄청난 규모의 프랑스 군함을 보고, 이 군함이 조선에 가게 되면 조선 사람들은 다 도망하게 될 것이며, 조선의 임금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리델의 일행은 천진에 있는 프랑스 공사관을 찾아가서 조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처참한 박해의 상황을 보고하게 되었고, 서양인들은 이 말을 들은 후 격분하여 조선을 침공할 것을 결의하였다. 조선을 침공할 것을 결심한 로즈제독은 1차로 한강변의 서강에, 2차로 군함 7척을 동원하여 강화도에 상륙한 후 살육과 살상, 그리고 귀중한 사고를 소각하고 그 일부를 약탈하였다.

이 사건 후 대원군은 이제 천주교인이면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로 굳게 맹세하고, 프랑스함대가 깊숙이 들어왔던 양화진 강가에서, 서양 오랑캐가 더럽힌 이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어 내림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숱한 천주교인들의 목을 베었다. 당시의 교황이었던 비오 9세는 교서를 조선의 교도들을 위해서 내리고 조선 가톨릭교도들의 수난을 위로하였는데, 이 교서에서 교황은 그 무서운 순교의 소식을 들을 때 심통해진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피로 얼룩진 현장에 십자가를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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