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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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남북 감리교회의 합동 1 조회수 : 3533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4-27
한국의 장로교회는 1912년에 총회가 독립하기는 했지만 독자적인 신앙고백과 정체성의 부재에 시달려왔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한국교회의 신앙이 미국교회의 역사적인 필연성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들어 선교부에서 완전히 독립된 한국적 감리교회의 형성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사의 신기원을 이룬 것이다. 조선 감리교회의 합동은 미국 선교회로부터의 독립으로서 뿐 아니라 1930년대, 교회의 병적 증상들이 어둡게 나타나던 때인지라 그 의미는 더욱 소중하였다.

감리교회의 민족의식은 일찍부터 나타났다. 신앙과 교리 및 정치적 체계가 완전히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남북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이 한국에 까지 영향을 미쳐 남북 감리교회로 분리될 수 없다는 민족적 주체의식 때문에 통합 형성의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지금 민족이 일본 치하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교회마저도 분리되어 있다면 일본에게 민족의 열등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은 교회의 통합을 서두르게 하였다.

이러한 숙원이 표면화되어 1924년 3월 5일에 서울에서 북감리교회 진흥방침 연구회와 남감리교회 진흥방침연구회가 합동을 위한 초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5년 그 안이 미국에 의하여 부결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한국교회는 “불가불 미국을 배제하고 단독으로라도 통합을 이루어야 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1926년 6월과 9월에 한국의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에서 각각 5명씩의 연구위원을 위촉하여 1927년 3월 29일에 “조선남북감리교회 통합방침 연합연구위원회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928년에 미국의 북감리교회와 1930년의 남감리교회의 총회가 이들의 보고서에 제시된 청원을 승인했을 때, 남북감리교회의 합동은 이미 최종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1930년 12월 2일은 한국교회의 역사에 길이 남을 뜻 깊은 나이었다. 그날 오전 10시에 혐성신학교에서는 통합총회가 개최되었고, “조선 감리교회”가 찬란한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 감리교의 교리적선언을 하였는데, 그 선언에는 신학의 광활한 발전과 사회 참여정신을 포함하고 있었고, 총회석상에서 한 웰치박사의 설교역시 동일한 내용을 포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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