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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공산주의의 핍박 조회수 : 2883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6-16
교회는 해방의 기쁨이 사라지기도 전에 안으로는 교회분열의 아픔을 밖으로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사회민주당”과 같은 장당이 출현하고, 신의주 학생봉기까지 일어나자 교회의 세력을 부르주와의 잔재요소로 규정하고 그 근절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지유를 김일성강령에서 표면적으로 표방한 공산주의가 직접적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교회를 근절하려는 그들의 계획은 늦춰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박해의 좋은 구실이 생겨나게 되었다. 북한 괴뢰정부의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6년 11월 3일(주일)에 실시하기로 하고 교회의 태도를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교회는 5개조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주일에는 예배 외에는 어떠한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정치와 종교는 엄격히 구분한다. 교회당은 예배외의 목적으로는 개방하지 않는다. 현직 교역자가 정치에 참여할 때에는 교직을 사임해야 한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이러한 내용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술책이 적중한 셈이었다. 이들은 투옥과 강제노동으로 교회를 탄압하는 한편, 1946년 11월 28일에는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여 김익두와 박상순 등의 목사를 감언과 공갈로 가맹시키고, 교회를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이용하였으며, 이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목사는 투옥과 추방으로 위협하였다.
신학교도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강재로 통합되었다. 1946년 9월에 창립된 감리교 성화신학교와 장로교위 평양신학교는 각각 600여명의 학생을 등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이들을 각각 60명으로 줄이고 1950년 3월에는 둘을 통합하여, “기독교 신학교”로 개칭하였다.

북한에서의 기독자의 수난은 김화식이 기독교 자유당을 설립하여 활동하다가 1947년 11월 순교한 것을 시발점으로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다. 그 후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인준이 소련군에게 자벼서 순교를 당했고, 이정심 역시 소련군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순교를 당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김철훈, 이유택이 따랐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투옥과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이처럼 이 땅의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거름으로 고난 속에서 성장을 거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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